23일 오전 서울 논현동 ㄷ고시원에서 방화·살인 사건을 저지른 정아무개(31)씨에 대한 현장검증이 벌어졌다. 희생자 유족들이 범인 얼굴 공개와 장례·보상 대책을 촉구하며 울부짖고 있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23일 오전 10시. 사흘 전 ‘묻지마 칼부림’으로 6명의 목숨을 앗아간 정아무개(31)씨가 참극의 현장인 서울 강남구 논현동 ㄷ고시원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경찰관에 둘러싸여 현장검증을 하는 정씨의 태도는 시종일관 침착했다. 마스크로 얼굴을 가렸지만 눈빛은 담담했다. 그는 범행 때와 마찬가지로 검정색 모자와 상·하의를 입고, 물안경, 랜턴, 라이터, 가스총 등을 갖추고 현장검증에 임했다.
고시원 3층 자신의 방에 들어선 정씨는 고개를 숙인 채 침대에 라이터로 불을 당기는 시늉을 냈다. 이어 복도로 나와 종이로 만든 흉기를 손에 쥐고 희생자 대역인 마네킹의 복부 부위를 여러 차례 찔렀다. 그는 맨 처음 마주친 재중동포 이월자(50·여)씨를 살해하는 상황을 태연하게 재연했다. 3~4층 복도에서 모두 9명한테 흉기를 휘두르는 상황도 재연했다. 정씨는 ‘어떻게 했느냐’는 경찰의 물음에 “배만 보고 찔렀다”고 짧게 답했다.
고시원 밖 경찰 저지선 너머에서는 눈물과 분노가 교차했다. 숨진 박정숙(52)씨의 남편 차아무개(52)씨는 현장에 도착한 정씨를 향해 “아내를 살려내라”며 소리를 질렀다. 몇몇 시민들은 정씨한테 욕설을 하고 생수병을 던지기도 했다. 차씨는 “중국에서 소식을 듣고 달려왔는데, 내 아내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 누구도 설명해 주지 않는다”며 울부짖었다. 그의 눈은 피곤과 분노에 핏발이 서 있었다. 고시원 골목 식당에서 일하고 있다는 황수옥(58)씨는 “사고 당일 출근길에 난리가 난 모습을 봤다”며 “정말 아무 상관 없는 사람들이 이렇게 죽어나가니 이게 제대로 된 세상이냐”고 말했다.
‘중국동포의 집’ 김해성 대표는 재중동포들과 함께 현장에 기자회견을 열어 정부의 대책을 촉구했다. 김 대표는 “우리 사회의 끄트머리에서 피해를 당한 재중동포들은 국적이 다르다는 이유로 범죄피해자 보상조차 받지 못한다”며 “장례비도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이들을 위해 국가가 피해자들의 합동 분향소를 만들고 부상자에 대한 치료와 보상을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노현웅 기자 golok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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