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시사다큐 ‘한큐’가 되돌아본 2008
집단지성 ‘촛불’ 탄생, ‘민주공화국’ 재확인
미국 월가쇼크 파장, ‘제2 IMF’시대 대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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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부자·고소영 내각’이라는 조롱이 유행어처럼 떠돌았던 2008년이 저물고 있다. 국보 1호 숭례문이 불에 탔고, 광화문에 컨테이너를 쌓아올려 국민소통을 막은 ‘명박산성’이 등장했으며, 산속 노승들까지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왔다. 승자의 메달도 값졌지만 패자의 눈물도 더욱 아름다웠던 베이징올림픽이 끝나자마자, 미국 월가에서 시작된 금융쇼크가 전세계를 휩쓸었다. ‘리-만브러더스’의 무능이 입에 올랐고, 비정규직과 자영업자의 상대적 박탈감은 더욱 커졌다. ‘낙하산 사장’이 들어앉아 기자들을 해직한 와이티엔 사태가 해를 넘길 태세이며, 방송법 개정 등으로 방송 간판급 앵커들도 대거 동참한 언론노조 총파업이 펼쳐지고 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첫 해인 2008년 한 해의 장면장면을 영상으로 묶었다. 취재영상팀
[한겨레시사다큐] 2008년을 돌아보다
[%%TAGSTORY1%%] 10년만의 정권 교체를 선택한 국민들은 기대에 부풀어 2008년을 맞이합니다. 새 정부가 침체된 경제를 살려줄 것이라는 기대도 컸습니다. 한나라 대통령 후보인 이명박 당선인는 삼청동에 인수위원회를 꾸리고 정권을 인수할 준비를 합니다. 그러나 인수위원회의 돌출적인 행보는 ‘MB정책’의 파장을 예고했습니다. 국보위 출신의 이경숙 위원장은 ‘영어몰입교육’ 구상으로 이른바 ‘아륀지’ 소동을 빚습니다. 이명박 정부가 닻을 올린 2월. 새로 들어설 내각의 면면이 공개됩니다. 강남 부동산 부자들과 고려대, 소망교회, 영남출신 인사들이 내각을 휩쓸었습니다. 강부자, 고소영 내각이라는 비판이 들끓었습니다. 이명박 정부 출범을 앞둔 2월 10일 새벽. 국보 1호 숭례문이 방화로 불에 타 무너졌습니다. 전문가들은 정부와 문화재청의 관리가 소홀했다고 지적합니다. 2월25일, 이명박 정부가 역사적인 출범을 알립니다. 이명박 정부는 “국민과 함께 비전과 미래를 향해 나아가 다함께 잘 살자”는 의미에서 ‘함께가요 국민성공시대’라는 슬로건을 내걸었습니다. 올 한해도 삼성 문제는 사회적 논란의 중심이었습니다. 3월 천주교정의구현 사제단은 김용철 변호사가 작성한 삼성그룹의 로비대상자를 추가로 공개합니다. 여기에는 이종찬 청와대 민정수석, 김성호 국정원장, 황영기 우리금융지주 전 회장 등이 포함돼 사회적 파장이 컸습니다. 이건희 삼성 회장이 4월 검찰에 소환됐습니다. 조사를 마친 이건희 회장은 퇴진 의사를 밝혔습니다. 정·재계에 큰 파장을 끼쳤고, 삼성은 법정에 섰습니다. 4월 9일. 총선이 치러졌습니다. 결과는 예상대로 한나라당의 압승이었습니다. 한나라당은 172석을 얻어 과반수를 넘었습니다. 대선에 이은 총선에서 압승한 한나라당은 확실하게 정국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대통령의 최측근인 이재오 의원이 낙선해 이명박 정부가 집요하게 밀어붙였던 대운하 등 개발정책에 제동이 걸렸습니다.
광장에 모인 수많은 ‘촛불’. 그들은 2008년의 주인공들입니다. 정부가 졸속으로 추진한 미국과의 쇠고기 협상이 발단이었습니다. 협상 결과를 발표한지 10일 뒤, 문화방송 피디수첩은 이 협상의 문제점과 광우병의 위험성에 대해 조목조목 지적합니다. 협상에 대한 거센 후폭풍의 시작이었습니다. 5월 2일. 청계광장에서 미국 쇠고기 수입반대를 위한 첫 번째 촛불문화제가 열립니다. 학생들이 주축이었습니다. 무려 1만 여명의 시민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목표는 단 하나, 재협상. 이후 촛불은 걷잡을 수 없는 들불로 번집니다. 1500여 시민단체가 참여한 광우병대책회의가 출범하고, 촛불은 전국에서 타올랐습니다. 당황한 이명박 정부는 22일에 대국민 담화를 통해 사과를 하지만, 재협상을 요구하는 촛불을 막지 못했습니다. 촛불은 5월24일 청계광장을 넘어 첫 가두시위를 벌입니다. 이명박 정부의 대응은 단호했습니다. 5월 31일 새벽. 삼청동과 청운동에서 물대포가 등장했고 경찰이 강제로 시위대를 진압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다쳤고 연행됐습니다. 촛불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치러진 6월 4일 재보선에서 한나라당이 참패합니다. 불과 두 달 만에 민심은 급변했습니다. 그리고 6월 10일, 드디어 촛불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의 숫자가 100만 명에 이르게 됩니다. 87년 6월 항쟁이 되살아난 모습이었습니다. 촛불들의 항쟁에 정부는 귀를 막았습니다. 경찰은 광화문 네거리를 컨테이너로 막았고, 시민들은 이를 ‘명박산성’이라고 불렀습니다. 정부는 6월21일 미국과 추가협상을 벌이지만 결과는 미흡합니다. 촛불은 계속 재협상을 요구하며 거리 시위는 더욱 격렬해졌습니다. 검찰은 ‘촛불의 배후’라며 MBC 피디수첩에 대한 수사도 착수합니다. 뜨거웠던 촛불은 7월 중순을 고비로 서서히 위축돼 가고 경찰의 진압은 점점 폭력성을 더해갑니다. 광우병대책회의, 한국진보연대, 민주노총 등에 대한 검찰 수사와 수배가 시작된 것입니다. 공안 정국의 신호탄이었습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방송가에서 터졌습니다. YTN 사장이 정권 입맛에 맞는 낙하산 인사로 교체되면서 방송을 지키려는 노조와 시민들의 싸움이 시작됩니다. MBC에서도 피디수첩에 대한 검찰수사에 거부하는 투쟁이 계속됩니다. 8월. 시민들은 오랜만에 희망찬 소식을 접합니다. 베이징 올림픽에 출전한 선수들이 종합성적 7위를 거둔 것입니다. 박태환, 장미란, 야구 대표팀 등이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베이징 올림픽에 시민들의 이목이 쏠린 사이 임기도 채 끝나지 않은 KBS 정연주 사장이 친정부성향의 이병순 사장으로 올림픽 기간 내 교체됩니다. 정권 초부터 제기된 종교편향 논란은 경찰이 조계사 총무원장의 차량을 검문하면서 극단으로 치닫습니다. 불교계는 촛불과 함께 종교편향 규탄 촛불집회를 서울시청 광장에서 열기도 했습니다. 정부는 한숨 돌릴 새가 없습니다. 9월부터 시작된 미국발 금융위기로 인해 한국도 금융과 실물경제에 직격탄을 맞은 것입니다. 펀드는 반토막이 났고, 환율은 1500원대로 치솟았고, 주가는 1000포인트 아래로 곤두박질 쳤습니다. 폐업, 감원 등 실물경제에도 칼바람이 불었습니다. 어려운 경제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대통령은 “펀드에 가입하겠다”거나 “지금 주식사면 1년 뒤 부자된다”고 말해 논란을 빚습니다. 대통령과 경제당국의 잘못된 경제 진단과 처방은 경제정책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려 위기를 부추긴다는 비판이 일었습니다. 인터넷에선 미네르바 등 경제 전문가 뺨치는 시민논객이 등장해 신드롬을 일으켰습니다. 11월 비정규직 투쟁의 상징인 이랜드 노사가 511일 만에 합의를 이끌어 냅니다. 노조 지도부의 희생을 대가로 얻어낸 반쪽짜리 성과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운이 좋은 케이스입니다. 아직도 기륭전자, 코스콤, 그리고 860만 비정규직 문제는 풀리지 않고 있습니다. 더욱이 정부와 여당은 비정규직 사용기간을 4년으로 연장하는 개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11월 4일. 세계의 눈이 미국으로 쏠립니다. 미국 대선에서 첫 흑인 대통령이 탄생한 것입니다. 버락 오바마 당선자는 복지를 강화하고 서민 경제를 살리겠다는 신 뉴딜 정책으로 경제 위기를 극복하겠다고 선언합니다. MB노믹스와는 정 반대 방향을 비전으로 제시한 것입니다. 12월 들어 교육계가 시끄럽습니다. 서울시교육청은 12일 일제고사 대신 체험학습을 허락한 교사 일곱 명을 해임과 파면합니다. 또한 교육과학기술교육부의 주도로 저자의 동의도 없이 근현대사 교과서를 편파적으로 수정하기로 결정합니다. 뉴라이트 보수 논객 일색의 근현대사 강의로 매일 아침 학교 정문이 소란스럽습니다. 교사의 대량 해임과 정권의 교육 통제 등 학교 현장도 예외없이 ‘잃어버렸다는 10년’을 넘어 역주행을 가속하고 있습니다. 해마다 12월이면 반복되는 여의도 국회의사당의 충돌이 올해는 더욱 거셉니다. 한나라당은 FTA 비준안을 상임위에서 기습 상정하고, 야당은 격렬하게 항의합니다. 나아가 한나라당이 ‘MB입법’에 드라이브를 걸면서 정치권은 마지막까지 국민들의 기대에 쇠망치를 내리쳤습니다. 그렇게 2008년이 역사 속으로 저물어갑니다. 박수진 피디 jjinpd@hani.co.kr
[%%TAGSTORY1%%] 10년만의 정권 교체를 선택한 국민들은 기대에 부풀어 2008년을 맞이합니다. 새 정부가 침체된 경제를 살려줄 것이라는 기대도 컸습니다. 한나라 대통령 후보인 이명박 당선인는 삼청동에 인수위원회를 꾸리고 정권을 인수할 준비를 합니다. 그러나 인수위원회의 돌출적인 행보는 ‘MB정책’의 파장을 예고했습니다. 국보위 출신의 이경숙 위원장은 ‘영어몰입교육’ 구상으로 이른바 ‘아륀지’ 소동을 빚습니다. 이명박 정부가 닻을 올린 2월. 새로 들어설 내각의 면면이 공개됩니다. 강남 부동산 부자들과 고려대, 소망교회, 영남출신 인사들이 내각을 휩쓸었습니다. 강부자, 고소영 내각이라는 비판이 들끓었습니다. 이명박 정부 출범을 앞둔 2월 10일 새벽. 국보 1호 숭례문이 방화로 불에 타 무너졌습니다. 전문가들은 정부와 문화재청의 관리가 소홀했다고 지적합니다. 2월25일, 이명박 정부가 역사적인 출범을 알립니다. 이명박 정부는 “국민과 함께 비전과 미래를 향해 나아가 다함께 잘 살자”는 의미에서 ‘함께가요 국민성공시대’라는 슬로건을 내걸었습니다. 올 한해도 삼성 문제는 사회적 논란의 중심이었습니다. 3월 천주교정의구현 사제단은 김용철 변호사가 작성한 삼성그룹의 로비대상자를 추가로 공개합니다. 여기에는 이종찬 청와대 민정수석, 김성호 국정원장, 황영기 우리금융지주 전 회장 등이 포함돼 사회적 파장이 컸습니다. 이건희 삼성 회장이 4월 검찰에 소환됐습니다. 조사를 마친 이건희 회장은 퇴진 의사를 밝혔습니다. 정·재계에 큰 파장을 끼쳤고, 삼성은 법정에 섰습니다. 4월 9일. 총선이 치러졌습니다. 결과는 예상대로 한나라당의 압승이었습니다. 한나라당은 172석을 얻어 과반수를 넘었습니다. 대선에 이은 총선에서 압승한 한나라당은 확실하게 정국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대통령의 최측근인 이재오 의원이 낙선해 이명박 정부가 집요하게 밀어붙였던 대운하 등 개발정책에 제동이 걸렸습니다.
광장에 모인 수많은 ‘촛불’. 그들은 2008년의 주인공들입니다. 정부가 졸속으로 추진한 미국과의 쇠고기 협상이 발단이었습니다. 협상 결과를 발표한지 10일 뒤, 문화방송 피디수첩은 이 협상의 문제점과 광우병의 위험성에 대해 조목조목 지적합니다. 협상에 대한 거센 후폭풍의 시작이었습니다. 5월 2일. 청계광장에서 미국 쇠고기 수입반대를 위한 첫 번째 촛불문화제가 열립니다. 학생들이 주축이었습니다. 무려 1만 여명의 시민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목표는 단 하나, 재협상. 이후 촛불은 걷잡을 수 없는 들불로 번집니다. 1500여 시민단체가 참여한 광우병대책회의가 출범하고, 촛불은 전국에서 타올랐습니다. 당황한 이명박 정부는 22일에 대국민 담화를 통해 사과를 하지만, 재협상을 요구하는 촛불을 막지 못했습니다. 촛불은 5월24일 청계광장을 넘어 첫 가두시위를 벌입니다. 이명박 정부의 대응은 단호했습니다. 5월 31일 새벽. 삼청동과 청운동에서 물대포가 등장했고 경찰이 강제로 시위대를 진압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다쳤고 연행됐습니다. 촛불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치러진 6월 4일 재보선에서 한나라당이 참패합니다. 불과 두 달 만에 민심은 급변했습니다. 그리고 6월 10일, 드디어 촛불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의 숫자가 100만 명에 이르게 됩니다. 87년 6월 항쟁이 되살아난 모습이었습니다. 촛불들의 항쟁에 정부는 귀를 막았습니다. 경찰은 광화문 네거리를 컨테이너로 막았고, 시민들은 이를 ‘명박산성’이라고 불렀습니다. 정부는 6월21일 미국과 추가협상을 벌이지만 결과는 미흡합니다. 촛불은 계속 재협상을 요구하며 거리 시위는 더욱 격렬해졌습니다. 검찰은 ‘촛불의 배후’라며 MBC 피디수첩에 대한 수사도 착수합니다. 뜨거웠던 촛불은 7월 중순을 고비로 서서히 위축돼 가고 경찰의 진압은 점점 폭력성을 더해갑니다. 광우병대책회의, 한국진보연대, 민주노총 등에 대한 검찰 수사와 수배가 시작된 것입니다. 공안 정국의 신호탄이었습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방송가에서 터졌습니다. YTN 사장이 정권 입맛에 맞는 낙하산 인사로 교체되면서 방송을 지키려는 노조와 시민들의 싸움이 시작됩니다. MBC에서도 피디수첩에 대한 검찰수사에 거부하는 투쟁이 계속됩니다. 8월. 시민들은 오랜만에 희망찬 소식을 접합니다. 베이징 올림픽에 출전한 선수들이 종합성적 7위를 거둔 것입니다. 박태환, 장미란, 야구 대표팀 등이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베이징 올림픽에 시민들의 이목이 쏠린 사이 임기도 채 끝나지 않은 KBS 정연주 사장이 친정부성향의 이병순 사장으로 올림픽 기간 내 교체됩니다. 정권 초부터 제기된 종교편향 논란은 경찰이 조계사 총무원장의 차량을 검문하면서 극단으로 치닫습니다. 불교계는 촛불과 함께 종교편향 규탄 촛불집회를 서울시청 광장에서 열기도 했습니다. 정부는 한숨 돌릴 새가 없습니다. 9월부터 시작된 미국발 금융위기로 인해 한국도 금융과 실물경제에 직격탄을 맞은 것입니다. 펀드는 반토막이 났고, 환율은 1500원대로 치솟았고, 주가는 1000포인트 아래로 곤두박질 쳤습니다. 폐업, 감원 등 실물경제에도 칼바람이 불었습니다. 어려운 경제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대통령은 “펀드에 가입하겠다”거나 “지금 주식사면 1년 뒤 부자된다”고 말해 논란을 빚습니다. 대통령과 경제당국의 잘못된 경제 진단과 처방은 경제정책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려 위기를 부추긴다는 비판이 일었습니다. 인터넷에선 미네르바 등 경제 전문가 뺨치는 시민논객이 등장해 신드롬을 일으켰습니다. 11월 비정규직 투쟁의 상징인 이랜드 노사가 511일 만에 합의를 이끌어 냅니다. 노조 지도부의 희생을 대가로 얻어낸 반쪽짜리 성과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운이 좋은 케이스입니다. 아직도 기륭전자, 코스콤, 그리고 860만 비정규직 문제는 풀리지 않고 있습니다. 더욱이 정부와 여당은 비정규직 사용기간을 4년으로 연장하는 개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11월 4일. 세계의 눈이 미국으로 쏠립니다. 미국 대선에서 첫 흑인 대통령이 탄생한 것입니다. 버락 오바마 당선자는 복지를 강화하고 서민 경제를 살리겠다는 신 뉴딜 정책으로 경제 위기를 극복하겠다고 선언합니다. MB노믹스와는 정 반대 방향을 비전으로 제시한 것입니다. 12월 들어 교육계가 시끄럽습니다. 서울시교육청은 12일 일제고사 대신 체험학습을 허락한 교사 일곱 명을 해임과 파면합니다. 또한 교육과학기술교육부의 주도로 저자의 동의도 없이 근현대사 교과서를 편파적으로 수정하기로 결정합니다. 뉴라이트 보수 논객 일색의 근현대사 강의로 매일 아침 학교 정문이 소란스럽습니다. 교사의 대량 해임과 정권의 교육 통제 등 학교 현장도 예외없이 ‘잃어버렸다는 10년’을 넘어 역주행을 가속하고 있습니다. 해마다 12월이면 반복되는 여의도 국회의사당의 충돌이 올해는 더욱 거셉니다. 한나라당은 FTA 비준안을 상임위에서 기습 상정하고, 야당은 격렬하게 항의합니다. 나아가 한나라당이 ‘MB입법’에 드라이브를 걸면서 정치권은 마지막까지 국민들의 기대에 쇠망치를 내리쳤습니다. 그렇게 2008년이 역사 속으로 저물어갑니다. 박수진 피디 jjin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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