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 시대가 틀림없긴 한가보다.
‘인터넷’은 작년 여름을 뜨겁게 달궜던 촛불집회를 가능하게 하고 그 과정에서 종전의 시민운동과는 혁혁히 다른 전개방식을 만들어냈다. 용산 참사가 묻히지 않고 팽팽한 의견 대립이나마 가져갈 수 있게 만든 것도 인터넷을 기반으로 칼라TV 같은 매체들이 탄생하고 활동하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 한몫했다.
그런 와중에 정부를 곤혹스럽게 만든 것은 ‘이메일’이었다. 청와대 홍보관이 용산 사건을 희석시키는 차원에서 강호순 사건을 적극 홍보하라는 이메일을 경찰에 내려보냈다가 드러나 곤욕을 치르더니, 이번 신영철 대법관 사건도 촛불재판 개입을 이메일을 보낸 것이 ‘모르쇠’란 말이 통용되지 못하게 발목을 붙잡으며 정부와 사법부에 대한 국민의 불신을 고조시키는데 일조했다.
상황이 이쯤 되고 보니 정부의 입장에선 사이버 시대가 무척이나 당황스럽고 두려울 만도 하다. 저항(?)하는 괘씸한 무리들에게는 신무기로 작동하는 것 같고 자기들에게는 잘 활용이 안 되고 자꾸 손에서 자폭하는 일이 반복되는 것 같이 느껴지니, 사이버고 사이버시대고 간에 어떻게든 차단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을리 없다. 그러고 보니 이런 사이버를 둘러싼 굵직한 해프닝들 사이사이에 한국에서 법과 제도의 적용과 제정을 둘러싸고 시끄럽게 일었던 갑론을박의 적잖은 부분이 ‘사이버를 포함한 미디어’ 재제에 있었던 것이 떠올려진다.
기득권 입장에서 언론은, 통제 가능할 때는 최고의 아군이지만 통제가 안 되면 거추장스럽고 거슬리는 게릴라군이었다. 그래서 어느 시대, 어느 나라나 독재성이 강한 정권일수록 언론을 장악하기 위해 부던히 애쓰고, 감추고 싶은 어두운 기억을 많이 가진 기업일수록 언론을 소유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사이버시대가 낳은 매체의 무한정 확대와 정보의 무차별 공유는 과거 한국 정권과 대기업이 심혈을 기울여 장악해온 언론통제와 왜곡을 흔들어댔다. 하지만 반대로 그동안 해온 노력으로는 과거와 같이 쉽사리 장악되거나 소유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아마도 이것이 지금 정부가 기를 쓰고 멀쩡한 사람들에게 온갖 법을 적용해 피고인을 만들고, 신영철 대법관 사건과 같은 무리수를 두고, 사이버상의 소통을 제약하는 법규를 만들려는 큰 이유일 것이다. 왜? 위험해보이니 말이다. (물론 그 법들 중에는 일견 필요해 보이는 법들도 있지만, 그들은 그것에 대해 열린 자세로 충분한 토의를 거칠 의사는 전혀 없어보인다) 그런데 이런 과정에서 한국 정부와 사법부는 그저 망신살 정도와 일부 밝혀진 책임자들의 사퇴 같은 정도와 비견할 수 없는 굉장히 중요한 것을 잃고 있다. 바로 국민 대다수가 날이 갈수록 정부가 표면적으로나마 바른 선택을 할 것이라든가, 법이 최소한 도덕적인 잣대나 구원이 되어줄 것이라든가, 기존의 거대언론들이 진실을 말할 것이라든가 하는 기대를 접고 있는데, 이는 국가와 사회가 최후의 순간까지 지켜야 하는 가장 기초적인 사회윤리를 스스로 상실시켜 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한국 정부가 깨달아야 할 것은 지금 잔뜩 경계하고 있는 사이버 (시대)보다 이렇게 잃어가는 신뢰와 기대가 국가의 존망에 훨씬 위험하다는 것이다. 물론 한국은 3권 분립의 나라다. (정치경제 시간에 이렇게 배운 것 같다. 뉴스를 통해 들여다보는 현실은 전혀 달랐지만 원칙은 그러하다) 대법관의 임명이나 임무수행은 대통령의 권한도 한나라당의 권한도 원칙적으로는 상관관계가 없다. 하지만 지금 국민 어느 누구를 붙들고 물어봐도 신영철 대법관의 그런 행보가 순전히 개인적인 촛불집회에 대한 소견과 소신만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생각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신영철 대법관 스스로 자신이 져야할 소명을 자신이 어떻게 져버렸는지 반성하고 책임지는 것도 중요하고 이것을 계기로 법관 인사제도와 배당문제에 대한 쇄신도 중요하지만, 아이들에게 낯 뜨겁게 가르치고 있는 정부와 사법기관의 독립성, 정권과 수사기관의 독립성, 공권력의 자본(기업, 기득권)으로부터의 투명성을 고민해야 할 때이다. 굳이 죽은 사람 이야기를 여기서 하고 싶지는 않지만, 최근 이슈가 된 탤런트 고 장자연의 문제도 연예계 비리만으로 바라보고 다룰 문제는 아니다. 법이 절망에 빠진 사람을, 억울한 상황을 구해줄 것이라 믿었다면, 지금 일어나는 자살의 반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사람들이 자력구제를 시도해 범죄자가 되는 일도 반은 줄어들었을 것이다. 법에 도움을 요청해서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어쩌면 장자연도 스스로 목숨을 끊기 전에 경찰이나 검찰 문을 한번쯤 두드려 보았을 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한국의 법과 공권력, 언론이 움직이는 방향을 보면 그런 용기를 낸다는 것은 죽은 그녀에게나 다른 자살자들, 자구책을 내고 움직이는 사람들 입장에서 쉽게 선택할 수 있는 일도, 권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이런 오늘날의 사람들의 뿌리 깊은 불신과 그로인해 파생된 그늘은 청와대 이메일이나 신영철 대법관 이메일 같은 해프닝이 밝혀짐으로써 가중되어 온 것이 아니다. 이런 일들이 밝혀지든 밝혀지지 않든, 이런 불신과 그늘은 이미 사람들 대부분이 이럴 것이라 믿게 된 ‘그간 행해지고 암암리에 느껴진 사실’에 근거한다. 오늘날 꽤 많은 젊은 한국인들이 각종 이민을 꿈꾸는 것은 더 잘살아보겠다는 장밋빛 꿈에서 비롯되기 보다는 한국에서 노력한 만큼 제대로 살 수 있을 거란 희망의 증발에서 비롯되고 있다. 정부가, 사법부가, 아직은 큰 마이크를 잡고 있는 거대 언론들이, 그리고 그 수혜를 나눠먹고 있는 한국의 기득권 계층들이, 이타적 마인드나 도덕성이 아닌 바로 자신들의 이익을 계속 존립시켜줄 이 사회의 유지를 위해서라도 심각히 고민해야 할 문제이고, 위태로운 시기란 것을 깨달았으면 좋겠다. 열흘 전에 노동부에서 "불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는 통지문을 보내왔다. 여러 사람들과 토론해볼 여지가 많은 부분이 있어서 아직 블로그에 오픈을 하지 않았고 내 글에 대한 편견을 만들까 주저스러워 아직 다루지 않고 있다. 나는 노동부의 그런 결정이 어떤 대내외적인 영향 때문이 아니라고 믿고 싶고, 그런 차원에서 한국의 노동부나 노동법의 적용이 근로자에게 얼마나 불합리적이고 불리한지를 토론하고 싶다. 그런 준비를 하고 있는 입장에서 보면, 이런 사건은 가히 절망적이고 개인을 한껏 부정적으로 만든다. 어쨌거나 향후 그런 토론의 장을 가져갈 때 이런저런 관계불신보다는 법리적용에 대한 객관적인 토론과 의견, 앞으로 내가 어떤 태도와 방법을 취해가면 좀더 긍정적일지에 대한 다양한 아이디어들이 공유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기득권 입장에서 언론은, 통제 가능할 때는 최고의 아군이지만 통제가 안 되면 거추장스럽고 거슬리는 게릴라군이었다. 그래서 어느 시대, 어느 나라나 독재성이 강한 정권일수록 언론을 장악하기 위해 부던히 애쓰고, 감추고 싶은 어두운 기억을 많이 가진 기업일수록 언론을 소유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사이버시대가 낳은 매체의 무한정 확대와 정보의 무차별 공유는 과거 한국 정권과 대기업이 심혈을 기울여 장악해온 언론통제와 왜곡을 흔들어댔다. 하지만 반대로 그동안 해온 노력으로는 과거와 같이 쉽사리 장악되거나 소유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아마도 이것이 지금 정부가 기를 쓰고 멀쩡한 사람들에게 온갖 법을 적용해 피고인을 만들고, 신영철 대법관 사건과 같은 무리수를 두고, 사이버상의 소통을 제약하는 법규를 만들려는 큰 이유일 것이다. 왜? 위험해보이니 말이다. (물론 그 법들 중에는 일견 필요해 보이는 법들도 있지만, 그들은 그것에 대해 열린 자세로 충분한 토의를 거칠 의사는 전혀 없어보인다) 그런데 이런 과정에서 한국 정부와 사법부는 그저 망신살 정도와 일부 밝혀진 책임자들의 사퇴 같은 정도와 비견할 수 없는 굉장히 중요한 것을 잃고 있다. 바로 국민 대다수가 날이 갈수록 정부가 표면적으로나마 바른 선택을 할 것이라든가, 법이 최소한 도덕적인 잣대나 구원이 되어줄 것이라든가, 기존의 거대언론들이 진실을 말할 것이라든가 하는 기대를 접고 있는데, 이는 국가와 사회가 최후의 순간까지 지켜야 하는 가장 기초적인 사회윤리를 스스로 상실시켜 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한국 정부가 깨달아야 할 것은 지금 잔뜩 경계하고 있는 사이버 (시대)보다 이렇게 잃어가는 신뢰와 기대가 국가의 존망에 훨씬 위험하다는 것이다. 물론 한국은 3권 분립의 나라다. (정치경제 시간에 이렇게 배운 것 같다. 뉴스를 통해 들여다보는 현실은 전혀 달랐지만 원칙은 그러하다) 대법관의 임명이나 임무수행은 대통령의 권한도 한나라당의 권한도 원칙적으로는 상관관계가 없다. 하지만 지금 국민 어느 누구를 붙들고 물어봐도 신영철 대법관의 그런 행보가 순전히 개인적인 촛불집회에 대한 소견과 소신만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생각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신영철 대법관 스스로 자신이 져야할 소명을 자신이 어떻게 져버렸는지 반성하고 책임지는 것도 중요하고 이것을 계기로 법관 인사제도와 배당문제에 대한 쇄신도 중요하지만, 아이들에게 낯 뜨겁게 가르치고 있는 정부와 사법기관의 독립성, 정권과 수사기관의 독립성, 공권력의 자본(기업, 기득권)으로부터의 투명성을 고민해야 할 때이다. 굳이 죽은 사람 이야기를 여기서 하고 싶지는 않지만, 최근 이슈가 된 탤런트 고 장자연의 문제도 연예계 비리만으로 바라보고 다룰 문제는 아니다. 법이 절망에 빠진 사람을, 억울한 상황을 구해줄 것이라 믿었다면, 지금 일어나는 자살의 반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사람들이 자력구제를 시도해 범죄자가 되는 일도 반은 줄어들었을 것이다. 법에 도움을 요청해서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어쩌면 장자연도 스스로 목숨을 끊기 전에 경찰이나 검찰 문을 한번쯤 두드려 보았을 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한국의 법과 공권력, 언론이 움직이는 방향을 보면 그런 용기를 낸다는 것은 죽은 그녀에게나 다른 자살자들, 자구책을 내고 움직이는 사람들 입장에서 쉽게 선택할 수 있는 일도, 권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이런 오늘날의 사람들의 뿌리 깊은 불신과 그로인해 파생된 그늘은 청와대 이메일이나 신영철 대법관 이메일 같은 해프닝이 밝혀짐으로써 가중되어 온 것이 아니다. 이런 일들이 밝혀지든 밝혀지지 않든, 이런 불신과 그늘은 이미 사람들 대부분이 이럴 것이라 믿게 된 ‘그간 행해지고 암암리에 느껴진 사실’에 근거한다. 오늘날 꽤 많은 젊은 한국인들이 각종 이민을 꿈꾸는 것은 더 잘살아보겠다는 장밋빛 꿈에서 비롯되기 보다는 한국에서 노력한 만큼 제대로 살 수 있을 거란 희망의 증발에서 비롯되고 있다. 정부가, 사법부가, 아직은 큰 마이크를 잡고 있는 거대 언론들이, 그리고 그 수혜를 나눠먹고 있는 한국의 기득권 계층들이, 이타적 마인드나 도덕성이 아닌 바로 자신들의 이익을 계속 존립시켜줄 이 사회의 유지를 위해서라도 심각히 고민해야 할 문제이고, 위태로운 시기란 것을 깨달았으면 좋겠다. 열흘 전에 노동부에서 "불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는 통지문을 보내왔다. 여러 사람들과 토론해볼 여지가 많은 부분이 있어서 아직 블로그에 오픈을 하지 않았고 내 글에 대한 편견을 만들까 주저스러워 아직 다루지 않고 있다. 나는 노동부의 그런 결정이 어떤 대내외적인 영향 때문이 아니라고 믿고 싶고, 그런 차원에서 한국의 노동부나 노동법의 적용이 근로자에게 얼마나 불합리적이고 불리한지를 토론하고 싶다. 그런 준비를 하고 있는 입장에서 보면, 이런 사건은 가히 절망적이고 개인을 한껏 부정적으로 만든다. 어쨌거나 향후 그런 토론의 장을 가져갈 때 이런저런 관계불신보다는 법리적용에 대한 객관적인 토론과 의견, 앞으로 내가 어떤 태도와 방법을 취해가면 좀더 긍정적일지에 대한 다양한 아이디어들이 공유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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