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 탤런트 이순재 선생이 장자연의 죽음을 두고 양비론을 펼친다. 연예인들과 방송언론사측 모두 “딴 짓”을 하려들기 때문에 문제라는 것이다. “딴 짓”이란 게 아마 성상납 관행을 말할 것이다. 얼핏 듣기에는 그럴듯한 지적이다. 선생의 훈시대로라면, 특히, 여성 연예인들은 출세를 위해서 그들 몸을 팔아서는 안 된다. 자기들 기량으로 대중과 소통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방송언론사측은 여성 연예인들의 몸을 탐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자질과 실력을 갖춘 연예인들을 키워줘야 한다.
그러나 이 순재 선생의 양비론은 장자연 사건의 본질을 흐리게 한다. 무엇보다도 성상납 풍조의 참 모습을 가려준다. 과연 장자연이 정상적인 활동을 뒷전으로 하고 “딴 짓”을 하려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인가? 방송언론사측이 자질과 기량 있는 여성 연예인을 발견했다고 가정하자. 그렇다고 그들에게 성상납을 요구하지 않을까?
장자연의 죽음이 도덕적 교훈으로 설명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다. 윤리의 잣대를 그녀의 죽음에 들이댔다가는 그녀에게 마냥 책임을 묻게 되기 십상이다. 장자연은 성상납 관행에 적응 못하고 저항하다가 죽음에 이른 케이스이다. 그녀의 죽음 이면에는 그 죽음을 가능하게 한 썩은 권력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권력을 옹호하고 보호하는 정치구조와 먹이사슬이 존재한다. 성상납의 윤리를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권력구조가 있다.
이 구조가 장자연과 같은 힘없는 여성 연예인들의 삶을 지배하려 들고 있다. 아니, 어떤 면에서 모든 여성 연예인들의 삶에 참견하려고 한다. 그들의 인격과 심리, 인맥과 돈줄을 이 구조의 사슬로 매어두려고 한다. 장자연 개인에게 이 권력은 자신의 요구를 이행하고 자신의 탐욕을 만족시키는 그릇의 역할을 해야 할 것을 기대했다. 그런데 장자연이 그 역할을 수행하지 않으려 했다. 이 권력은 의당 그런 그녀를 응징하려고 했을 것이다. 자기가 형성한 먹이사슬 조직망 바깥으로 그녀를 내쳐서 그녀의 인격적 사회적 존재감을 무화시키려했을 것이다. 장자연은 그 권력의 벽을 체험했을 것이고 그 앞에서 스스로 존재를 지워버린 것이다. 그것이 그녀가 선택한 죽음의 의미이다. 이런 사회 형편에서 어찌 윤리적 담론과 이성적 소통이 가능하겠는가?
나는 장자연의 죽음에 대해서 은연 중에 그 책임을 그녀 자신 탓으로 돌리려는 언론과 검찰의 합동작전에 분노한다. 이 정권의 속성이 다시금 진저리나게 모습을 드러낸다. 이 정권과 그에 빌붙은 재벌언론과 재벌기업이 YTN이나 MBC 등 방송 언론마저 손아귀에 넣게 된다면 이 사회가 구성원 개개인을 그리고 공동체 전체를 얼마나 깊게 윤리적 중병을 앓게 할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이순재 선생의 양비론은 이런 권력구조를 정당화시키는 폐단이 있다. 장자연 개인에게 책임을 돌려 그녀가 저항할 수 없는 권력을 합리화시킨다. 우리가 합리적 윤리적 담론의 공간이 폐쇄된 사회에 살고 있음을 직시하지 않는다.
장자연의 죽음은 한 개인의 불행이 아니다. 우리의 부끄러운 얼굴이다. 우리가 그녀의 죽음에 침묵하고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 간 어두운 권력에 눈 감아 준다면 우리는 그녀의 죽음에 한몫 거둔 것과 다름없다. 장자연의 죽음 뒤에 웅크리고 있는 불순한 권력들의 음험한 탐심을 밝힐 수만 있어도 우리는 또 다른 장자연, 아니, 이미 존재하는 많은 장자연들이 이순재 선생 말씀대로 그들 자질과 실력대로 자기의 존재감을 대중 가운데서 확인할 수 있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부끄러운 자화상을 어느 정도 지울 수 있는 길이 아닐까? 부디 연예인들이 자기 자질과 실력대로 얼마든지 자유롭게 활동하고 대중과 소통하는 사회가 도래하길 바랄 뿐이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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