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도쿄 맥아더사령부의 군무원(DAC) ‘K. M. CHUNG’ 이름으로 처음 투고한 글 ‘코리안을 위한 항변’이 실린 영어신문 <재팬 타임스>의 1951년 3월 28일치. 최근 신문사에 요청해서 받은 당시 신문이다.
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4
아무튼 한국이 일본의 지배에서 해방되었다는 시점에서 불과 5년이 지난 1950년 당시 일본 정부나 언론이 남북을 가릴 것 없이 재일 ‘조센진’에게 퍼붓는 차별과 적개심은 참으로 놀랄 만한 것이었다고 아니할 수 없더군요. 벨이 울리면 반사적으로 위액을 분비하는 파블로프의 실험동물처럼 강도살인 사건 같은 것이 있었다 하면 불문곡직 일본 언론은 조선인이 한 짓으로 보고, 비난 공격을 쏟아내는 것이 상례였다 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니었지요. 당시 일본 사회에는 정부나 언론을 막론하고 조선인을 깎아내리는 것으로 자기들에 대한 미국 사람들의 평가를 추어올리고자 하는 무슨 의도적인 정략이 발동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재일 조선인에 대한 반감의 선동이 심했어요.
미 극동군 사령부라는 직장에 있는 까닭에 나는 맥아더 장군 앞으로 보내오는 투서 같은 것도 읽을 기회가 있었는데, 그중에는 “조센진은 사자신중(獅子身中·은혜를 입고도 오히려 해를 입힌다는 뜻)의 버러지들이며, 일본의 민주화를 위해서는 암적인 존재”라는 것도 있었어요. 당시 오사카 근교의 이타미 비행장은 북조선에 대한 폭격기지였으니 매일같이 조련(총련의 전신) 산하의 조선인들이 몰려와 항의운동을 벌였을 것 아니겠소이까? 여기에 대해 맥아더 장군에게 보낸 편지도 있었는데 읽어보니 “이타미 비행장의 그 소란은 일본 사회의 질서를 무시하는 악질적인 조센진들의 범법행위일 뿐, 아무리 겉모양은 같다 해도 우리 일본인은 조센진과는 다르다. 그러니 제발 오해하지 말아달라”라는 것이더군요.
이런 판국에 일어난 것이 도쿄 쓰키지(築地)의 어느 라면집을 덮친 살인강도 사건인데, 범인은 주인집 가족을 도끼로 참살하고 그 시체를 토막질한 끔찍한 사건이었어요. 사건 발생 날짜는 51년 2월 23일이고요.
이 사건에 대해 <아사히신문>(2월 24일치)은, 그 집 사용인 야마구치라는 자의 증언에 따라 ‘밤늦게 침입한 범인은 장발에 얼굴이 긴 27~28살의 남자였는데 탁음(다쿠온) 발음이 부자연한 점으로 보아 일본인은 아닌 듯싶더라’는 기사를 보도했던 것이에요.
같은 날짜의 <마이니치신문> 기사는 더욱 구체적이었는데, 야마구치가 밤늦게 소변을 보러 계단을 내려가다 보니까 26~27살가량의 체구가 건장한 사나이가 있었는데, 본 것은 뒷모습뿐이어서 얼굴은 자세히 보지는 못했으나,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얼굴빛은 검푸른 점으로 보아 범인은 조센진이었을 것이라는 글을 대문짝만한 활자로 보도하더군요.
야마구치의 증언이 <아사히>와 <마이니치>에 보도되자 도쿄 각 신문은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얼굴은 검푸르며, 게다가 탁음 발음이 이상스러운 조센진”을 찾아내는 데 가히 광적이라 할 만큼 열을 올리고 있었어요. 이런 종류의 사건이 발생하면 으레 식자라는 사람들의 코멘트가 실리기 마련인데 그중에는 “이처럼 잔인한 범죄는 일본인으로서는 있을 수 없다”는 것도 있었소이다.
이 소란 중에 나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재일 조선인들이 남북을 가릴 것 없이 얼마나 전전긍긍, 몸 둘 바를 모르며 나날을 보냈겠나 상상해 보세요.
그런데 사건 발생 뒤 17일 만에 범인이 잡혔는데, 어이없게도 사건의 증인으로 언론의 각광을 받고 있던 야마구치 본인이었던 것이지요. 그는 물론 일본인이었고요.
너무나도 어처구니가 없고 끓어오르는 분통을 참을 길이 없어 곧 붓을 들어 <재팬타임스> 투고란에 글을 써서 보내지 않았소이까. <아사히>나 <마이니치>가 아니라, 영자지에 영문편지를 보낸 까닭은 옛날 나치스 독일이 자기들 아리안 민족은 지배민족으로 선택된 특수한 민족이고 그런 선민사상을 강조하기 위해 유대인들을 천민으로 박해했듯이, 일본 민족은 하늘에서 내려온 천손민족이고, 반대로 조선인은 태생적으로 천민으로 태어난 열등민족이라는 점을 미 점령군 당국에 납득시키려고나 하는 듯이, 일본 정부가 앞장서서 떠들어대는 모습이 내 눈에는 역력하게 보였기 때문이었어요.
그 투고는 ‘코리안을 위한 항변’(Koreans Defended)이라는 표제로 51년 3월 28일치 그 신문에 실렸어요. 지금 돌이켜보면 한국전쟁 초기 신문에 투고한 그 글이 20년쯤 뒤인 70년 내가 망명객으로 일본에 와서 전개하게 되는 문필활동의 효시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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