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이승만(왼쪽) 대통령이 특무부대장 김창룡(오른쪽)의 인사를 받고 있다. 대통령의 오른팔로 불리며 권력을 휘두르던 김창룡은 김구 선생 암살의 배후로 지목돼 56년 육군대령 허태영과 그 부하들에게 암살당했다.
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7
벌써 까마득한 옛날 얘기가 되어버렸으니 기억하는 사람도 거의 없겠으나, 6·25전쟁 초기 이승만 대통령이 ‘만일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하는 사태가 벌어진다면, 서슴없이 김일성과 손을 잡고 총부리를 돌려 일본군과 싸우겠노라’고 으름장을 놓은 일이 있었소이다.
그때 이 대통령이 무슨 특수한 정보를 쥐고 있었는지, 다만 직감적인 낌새를 느끼면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길은 없으나, 1949년 국공(國共) 내전에 패하고 당시 대만으로 쫓겨간 장제스가 중국 본토 재상륙 작전을 위해 예전 일본군을 대량(30만) 대만으로 데려다가 상륙작전의 첨병으로 쓸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소문도 항간에 널리 퍼져 있었지요.
또 주일 미8군이 한반도로 출격한 이후, 그 틈을 메우기 위해 일본에선 맥아더의 명령으로 그해 8월 경찰예비대(7만5천명)라는 것이 발족되었는데, 그 간부는 모조리 옛 황군(皇軍)의 대령급 장교로 채워졌으며, 명칭은 ‘경찰’이었으나 실제로는 전투부대였소이다.
이런 사태를 배경으로 이 대통령의 그 놀라운 발언이 나오지 않았나 하는데, 이 대통령이라면 그래도 독립운동으로 이름을 날린 분이고, 해방 후에도 떳떳한 반일인사라고 자처하지 않았겠소이까?
그러나 상징적인 일례로, 이 대통으로부터 지극한 총애를 받았던 사람 중의 하나가 특무대장 김창룡이었는데, 이 자가 ‘빨갱이’를 다루는 솜씨가 하도 잔인무도한 까닭에 미국 사람들조차 그를 ‘스네이크 김’(Snake Kim)으로 불렀다더군요. 김창룡은 함경도 출신으로 만주 관동군 헌병 오장(伍長)이었다가, 해방 뒤 친일파를 일소하던 이북에서 체포돼 재판을 받으러 가던 도중 도망쳐서 남쪽으로 빠져나온 인물이외다. ‘빨갱이’ 다루는 이 자의 솜씨에 홀딱 반한 이 대통령이 특무대를 설치하고 그를 우두머리로 앉혀 측근 중의 측근으로 총애를 하면서 그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게 되는 것이지요. 그 안하무인의 오만이 탈이 되어 마침내 같은 만주벌인 강문봉 일파한테 총격을 당해 목숨을 잃었지요. 아무튼 이 대통령은 주관적으로는 스스로를 반일 인사라 믿었을지 모르지만 그가 손발처럼 움직이면서 총애한 인물이 김창룡이었다는 사실로 보건대 객관적으로는 친일파였다고 할 수밖에 없지 않소이까. 이 나라가 오늘날까지 정신분열증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고 봐야 옳겠지요.
덤으로 한마디 하자면, 김구 선생께서 암살당하시던 날까지 헌병대장으로 있던 이가 장흥이라고, 백범이 충칭에서 데리고 온 사람이었죠. 그런데 선생이 암살당하자 그날로 장흥은 모가지가 날아가고, 후임으로 임명된 사람이 전봉덕이었사외다. 그는 일제 때 경기도 경찰국 형사였으며, 사상경찰 중에서도 가장 악질적이었다고 합디다. 이 얘기는 내가 문익환 목사와 같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이미 거처를 바꿔 거기서 살고 있던 전 외무부장관 최덕신씨한테서 들은 얘긴데, 그의 부친은 다 아다시피 상해 임시정부의 중진인 최동오 선생이외다.
이미 군정청 시대부터 한국인들의 증오의 대상이 된 인간 쓰레기들(riff-raff·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에 나오는 말)이 무엇 때문에 군정청 안에서 득시글거렸느냐? 미국 사람들 사이에서도 아마 문제가 됐는지, 그때 <볼티모어 선> 특파원 마크 게인 기자가 실태조사 겸 한국에 왔더이다.
마크 게인이 쓴 <재팬 다이어리>를 들춰보니, 그는 46년 10월 15일 한국에 왔고 열흘 뒤 군정청 경무국장인 윌리엄 매글린 대령을 만났더군요. 그때 매글린 대령이 기자에게 했다는 말을 그대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소이다.
“예전 일본인 밑에서 훈련받은 경찰관들을 군정청이 그대로 쓰고 있는 점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소이다. 그렇지만 군정청에 들어온 한국인 경찰들은요, 뭐라고 할까, 경찰관으로서는 날 때부터 타고난 재능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만일 그들이 일본을 위해 그처럼 충성을 다했다고 한다면 우리 미국한테도 꼭 같이 충성을 다해줄 것 아닙니까. 단지 일본 사람들 밑에서 훈련받았다고 해서 그들을 쓰지 않는다면 공평한 처사는 아니겠지요.”
한국에서 민주화운동이 일어난 근본적인 이유는 미국에 빌붙은 친일파 문제였다고 하겠는데, 이런 뜻에서 민주화운동은 ‘제2의 해방’을 추구한 운동이라고 해도 되겠지요.
내가 일본에 와서 활동을 시작하면서 쓰기 시작한 이 말을 가장 먼저 당신 자신의 말로 써주신 분이 문익환 목사이신데, 그것 때문에 문 목사는 종로5가 기독교인들로부터는 이단이라고 지탄을 받은 것이지요. 나는 나대로 무슨 까닭으로 <조선일보>와 같은 보수언론으로부터 “독의 원액”이라는 심한 욕을 얻어먹었느냐 하면, ‘제2의 해방’이라는 말이 그들의 비위를 건드린 탓이라고 나는 믿어요. 그 욕은 나로서는 다시없이 명예스러운 찬사였지만 말이외다.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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