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중학 38회 졸업생에서 한국군 수뇌부 장성이 세명이나 나왔다. 훗날 육군헌병사령관을 지낸 신상철, 합동참모본부 의장이 된 장창국, 육군참모총장에 오른 김용배군의 졸업 앨범 속 모습. 이들에게 군사교련을 지도한 일본군 출신 이응준 대좌는 초대 육군참모총장이 됐다. 사진 경기고동창회 제공
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12
전번 글에서 경기 5년간의 생활은 내게는 징역살이였다는 말을 했는데, 아침 조례시간에는 이와무라 교장이 자기의 선창으로 ‘시깅’(詩吟)이라는 것을 부르게 합디다. 시깅이란 한시를 일본말로 그네들 식의 곡조를 붙여 큰 소리로 부르는 것인데, 매일 아침 부르던 한시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소이다.
‘젊음은 한때이나 배움의 길은 이루기 힘든 것(少年易老學難成)/ 어찌 촌음이라 한들 가벼이 여길쏘냐(一寸光陰不可輕)/ 연못가 봄풀의 꿈에서 아직 깨나지도 않았는데(未覺池塘春草夢)/ 돌담 옆의 오동잎은 어언간 가을빛(階前梧葉已秋聲)’
이 시는 송나라 때의 ‘거유’ 주희가 읊은 ‘우성’(偶成)이라는 표제의 시인데, 나는 그 시 자체가 싫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풍기는 일본 냄새가 혐오스러웠던 것이지요. 지금 돌이켜보면 그 당시 내 몸에 배어 있던 찬송가적 정서 때문에 그 시깅이라는 것이 이질적이고 혐오스럽게 느껴졌던 일면도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바이외다.
아무튼 그 시깅이 시작될 무렵이면, 바로 옆이나 다름없는 보성중학 교정으로부터 ‘푸르고 아름다운 다뉴브강’의 경쾌하고 매혹적인 요한 슈트라우스의 왈츠가 흘러나오지 않았소이까. 나는 그때 만일 가능하다면 경기 교정(당시는 화동)을 뛰쳐나가 보성학교로 달려가고 싶은 심경이었소이다.
당시의 경기중학 교육이 철저한 황민화 교육이었다는 것은 앞서도 말한 바와 같지만, 그 교육이란 우리의 말과 이름을 빼앗고, 역사나 문화나 조선의 것은 다 천한 것이며 일본의 것이라야 가치가 있고 귀중하다는 사고를 주입하는 것이외다. 그 당시는 미처 모르고 있었으나, 오스트레일리아 백인들이 선주민족인 애버리지니에 대해서 실시했던 동화교육이 바로 그런 것이었지요.
아까 말한 그 주희의 시 얘긴데, 에도시대 일본에 주자학을 전파한 것은 임진왜란 때 포로로 잡혀갔던, 예를 들어 강항과 같은 학자들이었는데, 조선 사람들을 통해 배운 주자학이나 주자의 시문이, 이번에는 조선 사람들에게 일본화를 강요하는 황민교육의 수단으로 쓰였다는 이 사실, 이거 기가 막힌 얘기가 아니오이까.
내가 경기중학을 다닐 때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이 군사교련이었소이다. 4학년 때인가 새로 부임해 온 배속장교가 일본 사관학교 출신인 육군대좌였는데, 그는 실은 이응준이라는 이름의 조선 사람이었소이다. 엄격한 군인이어서, “기오쓰케”(차렷)하는 꼴이나 경례를 붙이는 내 모습이 유달리 신통치 않았던지 나는 여러 차례 그로부터 꾸지람을 듣고는 했어요.
이 대좌의 일본 육사 26기 동창 중에는 이청천 장군과 같은 분도 있었소이다. 이청천 장군은 3·1운동 당시 일본군에서 빠져나와 민족운동에 투신해 광복군 총사령관도 지냈고, 해방 뒤 귀국하여 대동(大同)청년단을 조직하는 등 애국운동을 하신 분이 아니오이까. 그러나 김구 선생이 암살당하고, 광복군이 신생 대한민국에서 푸대접을 받는 바람에 별로 빛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는데, 그냥 일본군에 눌러앉아 있던 이응준 대좌는 해방 뒤 이승만 정권 아래서 승승장구해 초대 육군참모총장이 되었다는 것은 아마 여러분도 다 알고 있으리라 믿는 바이외다.
그런데 이 이응준 대좌로부터 훈련을 받은 경기 38회 졸업생 중에서 육군참모총장 등 국군 최고 수뇌부 장성이 세 사람씩이나 배출되었소이다. 그중에서 신상철, 장창국 두 사람은 정식으로 일본 육사로 진학하여 군인이 되었고, 육군 대장이 된 김용배군은 학도병 출신이라오. 아무튼 초대 육군참모총장이 옛날의 이응준 대좌이고, 그분의 훈도를 받은 경기 38회 동기 중에서 국군 최고 수뇌부 장성이 세 사람이나 나왔다면, 가히 대한민국 국군은 경기 38회의 손아귀에 있었노라고 하겠지요? 그런 연유인지 그 경기 38회 졸업생 동창회를 임오(壬午)군단이라고 한다고 듣고 있소이다. 딴은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났던 것이 1882년이고, 38회생이 졸업한 해가 그 60년 뒤인 1942년이니까 알 만도 한 이름이지요.
같은 동창생으로서 긍지를 느낄 만한 노릇이고, 아무개 아무개는 내 동창생이라고 뽐낼 만도 한 일이나, 약간 맘에 걸리는 점이 없지도 않소이다. 60만 국군을 휘어잡고 있던 것이 임오군단이라면, 의당 경기중학 때 받았던 그 황민교육의 군때는 말짱히 벗고, 그러고서 국군의 제복을 입었으리라 믿으면서도, 기우일지는 모르겠으되, 과연 어떨까 하는 생각이 스쳐가고는 하오이다. 그 임오군단의 중심 인물 몇몇 사람이 그렇게도 황민화 교육에 열심이던 이와무라 교장을 서울까지 모셔다가 절을 올리고 융숭한 잔치를 벌였다고 하니 말이외다.
이제 나 자신의 얘기를 해야 되겠는데, 그 임오군단이 말이외다. ‘정경모 그놈은 국금(國禁)을 범하고 평양까지 가서 김일성이를 만나고 했다니 간첩이 아닌가. 안 되겠다. 제명처분 하자.’ 그래서 38회 동창회에서는 나를 간첩으로 몰아 제명처분을 내렸다는 것이외다. 정식으로 통고를 받은 일은 없소이다마는.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그런데 이 이응준 대좌로부터 훈련을 받은 경기 38회 졸업생 중에서 육군참모총장 등 국군 최고 수뇌부 장성이 세 사람씩이나 배출되었소이다. 그중에서 신상철, 장창국 두 사람은 정식으로 일본 육사로 진학하여 군인이 되었고, 육군 대장이 된 김용배군은 학도병 출신이라오. 아무튼 초대 육군참모총장이 옛날의 이응준 대좌이고, 그분의 훈도를 받은 경기 38회 동기 중에서 국군 최고 수뇌부 장성이 세 사람이나 나왔다면, 가히 대한민국 국군은 경기 38회의 손아귀에 있었노라고 하겠지요? 그런 연유인지 그 경기 38회 졸업생 동창회를 임오(壬午)군단이라고 한다고 듣고 있소이다. 딴은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났던 것이 1882년이고, 38회생이 졸업한 해가 그 60년 뒤인 1942년이니까 알 만도 한 이름이지요.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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