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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6월항쟁때도 월드컵때도 시민들의 소통공간 상징

등록 2009-05-26 19:50수정 2009-05-27 00:49

서울광장 열어야할 이유
[하니뉴스]한밤 덕수궁 돌담길, 늘어선 촛불들이 길을 밝혀…

[%%TAGSTORY2%%]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이 전해진 23일 추모객들이 자발적으로 ‘시민 분향소’를 차린 곳은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이었다. 처음 분향소 설치를 주도한 시민 이강수(46)씨는 “대한문 앞은 조선시대에도 민중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모이곤 했던 곳”이라며 “경찰이 봉쇄한 서울광장을 빼고 시민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이곳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이 타계하고 나흘이 지난 26일, 서울역 등에 정부 공식 분향소가 설치됐지만 ‘시민 분향소’를 찾는 추모 행렬은 끊이지 않고 있다.

전우용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교수는 “고종이 1897년 경운궁(덕수궁)으로 거처를 정한 뒤 그 앞에서 이뤄진 시위는 너무 많아 일일이 세지 못할 정도”라고 말했다. 고종 사후 백성들은 임금의 처소였던 대한문 앞으로 구름 떼처럼 몰려들어 망곡(望哭)을 했고, 그 열기는 3·1 운동으로 이어졌다.

이 공간은 1987년 6~7월 다시 한 번 역사의 무대가 됐다. 최루탄에 맞아 숨진 연세대생 이한열씨의 노제가 서울시청 앞에서 치러질 때, 당시 분수대 주변으로 몰려든 인파는 차고 넘쳐 대한문 앞까지 빼곡하게 들어찼다. 2002년 6월 월드컵 축구 응원, 미군 장갑차에 깔려 숨진 효순이·미선이 추모제 등을 거치며 민주화를 열망하는 시민들의 소통 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

차도에 막혀 있던 이 공간에 활기를 불어넣은 이는 이명박 대통령이었다. 그는 서울시장으로 재임하던 2004년 5월1일 주변 차도를 헐고 잔디와 화강암으로 꾸며진 지금의 광장을 만들었다. 그러나 자유로운 소통의 공간을 꿈꿨던 기대와 달리 이 대통령은 ‘서울광장의 사용 및 관리에 관한 조례’를 만들어 집회·시위 등 시민들의 자유로운 광장 사용을 금지했다. 이후 서울광장은 ‘하이서울 페스티벌’ 등 서울시가 주도하는 행사 마당으로 변했다.

시민 분향소 주변을 ‘병풍처럼’ 둘러쳤던 대한문 앞 차벽은 이날 정오께 없어졌지만, 횡단보도 건너 서울광장을 둘러싼 차벽은 여전했다.

[하니뉴스] 아주 떠나지는 말아요


[%%TAGSTORY1%%]

길윤형 김민경 기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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