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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길을찾아서] 짐 꾸려 서울로…‘14년 생이별’의 시작 / 정경모

등록 2009-06-22 18:33수정 2022-02-23 16:14

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36
‘민족정신’을 일깨워야 한다는 깨달음으로 작가로 투신해 <아큐(Q)정전> <광인일기> 등을 남겼다. 왼쪽은 1933년 상하이 외국인보호구역에서 피신해 있을 무렵의 루쉰
‘민족정신’을 일깨워야 한다는 깨달음으로 작가로 투신해 <아큐(Q)정전> <광인일기> 등을 남겼다. 왼쪽은 1933년 상하이 외국인보호구역에서 피신해 있을 무렵의 루쉰

미군사령부로부터 ‘기피인물’이라는 낙인이 찍힌 이상 도쿄의 미국대사관이 내게 비자를 발급해줄 리는 만무하고, 모교 에머리대로 돌아가 학업을 계속한다는 꿈도 깨졌으니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될 것인지, 요코다 공항에서 집으로 돌아오면서 곰곰 생각에 잠겨 있었을 것 아니오이까. 이리저리 생각한 끝에 아무래도 나 자신이 무엇이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기 위해서는 본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옳은 길이라고 맘을 먹었소이다.

그때 또다른 선택이 하나 있었다고 하면 해방 직전까지 학적을 두고 있었던 게이오대학 의학부로 복학하는 길이었을 것이외다. 그 당시 외지에 나가 있던 군인들 중에 서른이 훨씬 넘은 나이에 입학시험을 치르고 의대 초년생이 되는 예는 얼마든지 있었으니 게이오대학을 찾아가 서울대학과 에머리대학에서의 학력을 제시하고 복학을 신청한다면 학교당국이 들어줄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을 것이오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때 심경으로는 도무지 의사로서 한세상을 산다는 생각에 거부감이 북받쳐 오르더군요. 그동안 겪은 일이 너무 많았고,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면서 일생을 보내기에는 너무나도 버거운 현장을 목격해온 탓이었던지, 아무튼 딴생각 말고 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뒤에서 나를 떼밀지 않겠소이까. 돌아가서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해야 되겠다는 복안 같은 것이 있었던 것도 아니면서 말이오이다.

여기서 중국의 문호 루쉰 선생의 얘기를 해야 할 듯하오이다. 루쉰(1881~1936)은 중국이 가장 절망적인 암흑 속에 묻혀 있던 시대를 산 분인데, 젊어서 의학공부를 할 생각으로 일본에 와서 센다이 의전(현 동북대학 의학부)에 학적을 두고 있던 유학생이었소이다. 그때가 러일전쟁(1904~05)으로 일본 전체가 전승 무드로 들끓고 있을 때였는데 어느날 만주에서 싸우고 있는 일본군의 용맹스러운 모양을 학생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간첩이라고 잡혀온 중국인을 일본도로 목을 쳐 죽이는 처형 장면을 환등기로 보여주는 행사가 교실에서 있었다는 것이오이다. 그런데 구경꾼으로 동원되어 거기 모인 중국 농민들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 참혹한 광경을 물끄러미 보고 서 있더라는 것이었소이다. 루쉰은 중국 4억의 민중이 정신적으로 질병을 앓고 있는데 자기가 장차 의사가 되어 육체적으로 앓고 있는 백명이나 천명쯤의 중국인 생명을 치료해 준들 거기에 무슨 뜻이 있겠나, 대오일성한 나머지 그길로 의학공부를 중단하고 문필활동을 시작했던 것이외다. 루쉰 선생은 문필활동을 통해 신해혁명을 겪은 후에도 깊은 잠에서 깨어날 줄 모르는 중국 대중들의 각성을 위해 예컨대 <광인일기>나 <아큐정전> 같은 많은 글을 남기지 않았소이까.

내가 후일 일본에 와서 망명을 선언하고 문필활동을 시작하면서 일본인들 앞에서 강연회 같은 것을 열라치면, 청중으로부터 정 선생 당신이 의학공부를 중단하고 지금 문필활동을 하고 있는 것은 루쉰 선생으로부터 받은 정신적인 자극 때문이 아니었냐는 질문을 지금도 심심찮게 받고는 있사외다만. 내가 미군사령부로부터 추방을 당한 뒤 서둘러 한국으로 돌아갈 결심을 했을 그 당시에는 부끄러운 말이나 나는 루쉰의 ‘루’자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외다.


오른쪽은 중국 작가 장자오허가 그려낸 ‘아큐’의 모습.
오른쪽은 중국 작가 장자오허가 그려낸 ‘아큐’의 모습.

아무튼 집으로 돌아와 아내 치요코에게만 판문점에서 이만저만한 일이 있었다는 것을 간략하게 설명을 하고 서울로 돌아갈 결심을 알렸소이다. 자리가 잡히는 길로 통지를 하겠으니 그때 서울로 오라는 말을 남겨놓고 아내와 세살 된 맏아들 강헌이를 장모님께 맡겨둔 채 나는 혼자서 서울로 돌아가지 않았소이까. 아내 치요코는 그때나 지금이나 남편인 내가 이렇다고 하면 그저 그런 줄만 알고 묵묵히 순종할 뿐인 너무나도 착하디착한 성격의 여성이오이다. 내가 서울로 돌아간다니까 아무 소리도 안 하고서 짐을 꾸려 나를 떠나보냈소이다. 그것이 나는 나대로, 또 치요코는 치요코대로 고독과 절망 속에서 보낸 장장 14년 동안의 생이별의 시작이었다는 것을 나는 상상조차도 하지 못했소이다. 1956년 서른두살 때 집을 떠나 70년 마흔여섯이 되어 돌아온 14년 동안 나 자신이 곤경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사느라 생활비 한푼 보내줄 형편이 아니었고, 치요코가 일을 하면서 모친을 모시고 아이를 키울 수밖에 없었으니 그 고생을 무슨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있겠소이까.

그런데 14년 만에 빈털터리로 돌아온 못나터진 남편, 남편답지 못한 남편인 나를 불평 한마디 없이 맞아주지 않았소이까. 그동안 서러웠다는 투정을 나는 한번도 들어본 일이 없었소이다.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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