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 1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된 조봉암(맨 왼쪽) 당수와 진보당원들이 재판을 받고 있다. 조봉암은 이듬해 2월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 판결을 받고 재심을 청구했으나 7월 31일 기각된 지 10시간 만에 형장의 이슬이 되고 말았다.
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38
이제 상당히 연로한 노인층이 아니면 죽산 조봉암(1898~1959) 선생의 이름 석자를 기억하는 사람조차 드물 것이나, 1948년 제헌선거 때 전혀 이름도 없고 돈이나 조직도 없는 그가 인천에서 출마해서 제꺽 당선돼 국회의원이 된 것은, 일제 때부터 항일운동에 나섰던 그의 인품이 출중했던 까닭이었소이다.
그가 살다 간 시대는 약간이라도 민족문제에 대해 뭘 좀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으레 조금씩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물이 들 때가 아니오이까. 실상 알고 보면 민족주의와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서로 대립되는 사상이지만 말이외다. 조봉암 선생도 그 시대를 산 지식인으로서 25년 조선공산당이 조직될 때 박헌영과 더불어 창당 당원으로 입당했던 분이오이다. 그러나 해방 후 남로당의 박현영과는 잘 맞지 않았던 까닭인지 전향을 선언하고 우익 정객으로 정계로 돌아선 분인데 국회의원이 되자마자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발탁되었다는 사실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눈에 띄게 탁월한 인품의 소유자였는지 짐작할 만하지 않소이까.
그분과는 스무살 넘게 나이차도 있고, 또 그분이 국내에서 활약하는 동안 나는 줄곧 국외에 있었기 때문에 조 선생을 직접 만나 뵌 일은 없으나, 여운형 선생이 남긴 글을 보면 그는 술을 잘하고 시를 읊으며, 강개가 북받치면 눈물을 줄줄 흘리는 호한이었다는 것이외다. 그 조 선생을 대통령 이승만은 북과 내통했다는 누명을 씌워 교수형으로 죽인 것이외다.
조 선생은 이승만 정권에서 농림부 장관을 지내면서 대통령으로서의 이승만의 자질이나 경륜에 대해 무엇인가 느끼는 바가 있었던지, 52년 제2대 대선 때 그에 맞서 후보로 출마한 것이었소이다. ‘괘씸한 놈’이라는 미움은 이미 그때부터 사고 있었겠으나, 그때 이승만 표는 500만, 조봉암 표는 80만이니 투·개표에서의 부정을 고려한다면 조 후보의 표는 80만보다 훨씬 많았던 것이 아니었겠소이까. 이 대통령이 괘씸하다는 정도를 넘어 ‘요거 맹랑한 놈이로구나’ 하는 위기감을 품게 되었다 해도 무리는 아니었겠지요. 아무튼 문제는 56년 신익희 선생이 유세중에 열차 안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던 제3대 대선 때였는데, 이때 막 조직을 끝낸 진보당을 배경으로 한 조 후보의 전과는 이승만의 간담을 서늘하게 할 만한 것이었소이다.
이 얘기는 진보당 부통령 후보로 조 선생과 같이 뛰려다가 야당연합이라는 명분을 위해 후보 자리를 민주당 장면씨에게 양보했던 박기출씨가 70년대 잠시 일본에 와 있을 때 내게 직접 들려준 것인데, 부산 각구에서는 어디를 보나 모두가 조봉암 표뿐이었고, 경찰이 눈을 밝히고 있는 개표장에서는 하는 수 없이 조봉암 표를 가운데다 끼고 아래위에 이승만 표를 붙인 샌드위치 묶음을 만들 수밖에 없었는데 나중에 가서는 이승만 표는 아래위로 붙일 것조차 모자랄 지경이었다는 것이었소이다.
그러니 이 대통령이 조봉암과 같은 정적의 존재를 허용할 리가 있었겠소이까. 양명산이라는 거짓 증인을 내세워 북한과 내통해 2만달러의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터무니없는 죄를 씌워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조 선생을 체포했는데, 그것이 58년 1월 28일이었소이다.
대법원은 미리 써놓은 시나리오대로 제4대 대통령 선거일로부터 약 1년 전인 59년 2월 27일, 사형 확정 판결을 내렸소이다. 변호인단은 곧 재심 청구를 냈소이다만 대법원은 일방적으로 이를 기각하고 그해 7월 31일 판결이 나온 지 겨우 열 시간 만에 사형을 집행해 버렸소이다. 조 선생은 마치 저녁 먹은 뒤 침실로 들어가듯 침착하고 평온한 걸음으로 교수대에 올라갔다고 들었소이다.
판국이 이 지경이니, 이미 이 대통령으로부터는 미움을 사고 있던 터이며, 더구나 사상이 의심스럽다는 이유로 미군사령부에 의해 기피인물이라는 낙인이 찍혀 있는 나로서는 대한민국 땅 어디에 설 자리가 있었겠소이까. 그래도 자기가 무엇이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증명하기 위해서는 본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옳은 길이라고 믿으면서 처자 식구를 일본에 놔둔 채 돌아왔는데, 아차 그것이 틀린 판단이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나는 독 안의 쥐 꼬락서니였으며, 빠져나가려야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았소이다.
그런데 끙끙 속으로 앓고 있던 차에 이듬해인 60년, 4·19혁명이 터지지 않았소이까. 물론,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 4·19라는 폭탄에 불을 댕긴 것은, 최루탄을 맞고 목숨을 잃은 어린 소년 김주열군의 시체가 그해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 떠올랐다는 사실이었겠으나, 조봉암 선생의 처형으로 이승만 정권의 붕괴 절차는 이미 시작되었노라고 지금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는 바이외다.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그런데 끙끙 속으로 앓고 있던 차에 이듬해인 60년, 4·19혁명이 터지지 않았소이까. 물론,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 4·19라는 폭탄에 불을 댕긴 것은, 최루탄을 맞고 목숨을 잃은 어린 소년 김주열군의 시체가 그해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 떠올랐다는 사실이었겠으나, 조봉암 선생의 처형으로 이승만 정권의 붕괴 절차는 이미 시작되었노라고 지금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는 바이외다.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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