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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길을찾아서] 현대사 격랑 속 ‘한배 탄 세사람’ / 정경모

등록 2009-07-08 18:39수정 2009-07-09 19:38

필자가 일본에 건너가 가장 먼저 인연을 맺은 한국사람인 배동호 민족통일협의회장은 김대중씨와 더불어 필자의 일본 망명 활동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이후 한통련 3대 의장을 지낸 배씨는 2003년 9월 광주 국립5·18묘지를 찾은 당시 한통련 간부들의 손에 영정(왼쪽) 만이 귀국해 참배했다.
필자가 일본에 건너가 가장 먼저 인연을 맺은 한국사람인 배동호 민족통일협의회장은 김대중씨와 더불어 필자의 일본 망명 활동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이후 한통련 3대 의장을 지낸 배씨는 2003년 9월 광주 국립5·18묘지를 찾은 당시 한통련 간부들의 손에 영정(왼쪽) 만이 귀국해 참배했다.
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48
배동호씨가 ‘민단’(대한민국거류민단) 조직을 뛰쳐나와 별도로 ‘민족통일협의회’라는 새로운 조직을 결성하게 된 것은 이른바 ‘녹음사건’이 계기가 됐다는 사실도 차차 알게 되었소이다.

1971년 3월 민단 단장 선거 때 후보가 주류파인 이희원과 비주류파인 배동호 두 사람이었는데, 주류파를 두둔하는 김재권 공사(김대중 납치사건 때 현장 지휘자)가 비주류파인 배씨를 때리기 위해 공개석상에서 발표한 것이 자기가 가지고 있다는 녹음테이프였는데, 그 테이프에는 배씨가 한 호텔에서 ‘총련’ 간부들과 만나 밀담을 거듭한 내용이 들어 있다고 단언했다는 것이외다. 결국 테이프의 구체적인 내용은 발표된 일이 없었고, 밀담이 있었다는 것도 증명되지 않은 채, 선거에서 당선된 것은 주류파 이희원이었던바, 바로 그 직후 7·4공동성명이 발표된 것을 계기로 배씨 일파(민단 도쿄본부·가나가와본부·한국청년동맹 등등)는 민단을 탈퇴하고 새 조직, 민족통일협의회를 설립한 것이었소이다. 바로 그 무렵 배씨가 나와, 또 망명을 선언한 김대중씨를 별도로 만나, 이를테면 오월동주처럼 세 사람이 같은 배를 타게 된 것이외다.

그런데 이 세 사람 때문에 한민통이란 존재가 극적으로 떠올랐고, 이것이 조직돼 가는 도중인 73년 8월 ‘김대중 납치사건’이 발생했으며, 중앙정보부(KCIA) 공작선인 용금호 선상에서 김씨가 바다로 던져지려는 아슬아슬한 찰나, 키신저의 지시로 날아온 헬리콥터 덕에 죽음을 모면하고, 며칠 만에 서울 동교동 자택으로 돌아갔다는 활동사진 같은 사건이 벌어지지 않았소이까. 이를 계기로 엄청난 역사가 시작되는 것인데, 여러분은 기억을 가다듬고서 그 뒤 발생한 길고 긴 현대사의 줄거리를 상기해 주기 바라는 바이외다.

우선 79년 이란에서 일어난 호메이니혁명의 여파로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권총으로 박정희를 암살하게 되며, 역시 테헤란 사태의 연장선 위에서 80년 5·18광주항쟁이 발생했으며, 그때 김대중씨가 체포당해 사형을 선고받은 것은 그가 일본에서 반국가단체인 한민통을 조직하고 그 수괴의 자리에 있었다는 게 이유였던 것이외다.

아무튼 그 5·18 때 군부세력이 자행한 행패가 너무나 잔인했다는 울분이 7년 뒤 박종철군 고문사로 폭발해 6월항쟁을 불러일으킨 것이며, 그 때문에 6·29선언이 나와 미국 망명에서 돌아와 칩거중이던 김대중씨조차 대통령 후보로 출마할 수 있는 ‘특권’이 베풀어졌던 것이 아니오이까.

그러나 후보 단일화를 거부한 김씨의 현명치 못한 결정으로 뚱딴지같이 정권을 노태우 손에 넘겨준 결과가 초래되었으니, 6월항쟁 때의 그 뜨거웠던 열기는 하루아침에 흩어져버리고, 방향감각을 잃은 민중들은 갈 곳을 모른 채 헤매게 된 것이 아니오이까.

이 절망적인 사태를 타개하고 그래도 오늘날 얘기하는 ‘87년 체제’라는 것을 유지하게 된 결정적인 힘을 발휘한 인물은 아직도 서슬이 시퍼렇던 국가보안법을 어기면서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 회담을 거듭한 뒤, 그 성과를 4·2남북공동성명의 형태로 남겨 놓은 문익환 목사였노라고 나는 확신하고 있는 바인데, 그 4·2성명 덕택으로 겨우겨우 유지되었던 6월항쟁의 열기를 발판으로 김대중씨가 노태우, 김영삼에 이어 대통령 자리에 앉게 되고, 지난날의 동지였던 문 목사의 발자취를 따라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6·15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게 되지 않소이까. 그 후 남북을 망라하면서 전세계적으로 전개되는 민족운동은 4·2성명을 이어받은 6·15 정신을 토대로 하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김대중 납치사건을 시발점으로 하여 6·15남북공동성명에 이르는 길고 복잡한 구절양장의 역사 마디마디에서 일정한 역할을 맡았던 것이 김·정·배 산하의 단체이었소이다.

그렇다면 이 3자가 서로 돕고 협조하는 가운데 각자가 역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았소이다. 불신과 대립, 그리고 격심한 갈등 속에서 3자는 각기 맡겨진 임무를 역사의 무대 위에서 펼쳤을 뿐이오이다.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그렇다고는 하나 우선 나 자신이 한국을 떠난 지 채 2년이 안 돼서 아사히신문사를 통해 책을 출판함으로써 일본에서의 문필활동이 가능할 만한 기반을 잡고 있었다는 사실, 김대중씨가 10월유신 쿠데타의 낌새를 미리 알아차리고 일본에 와서 망명을 선언했다는 사실, 그리고 또 민단 비주류파인 배동호씨가 민단 조직에서 탈퇴하여 민족통일협회라는 새 조직을 결성하였다는 사실, 이상 세 가지 사실이 상호간에 아무 관련이 없이 독자적으로 발생하여 7·4공동성명 직후에 아무튼 같은 배에 몸을 싣고 역사의 격류를 타면서 흘러 내려왔다는 사실은 우연치고는 너무나도 기묘했으며, 지금 이 글을 쓰고 있으면서도 참으로 기이한 노릇이었다는 느낌을 금할 수가 없는 바이외다.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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