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아무개(46)씨는 지난해 10월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 길거리에서 우연히 나아무개(53)씨를 마주쳤다. 순간, 김씨의 머리 속에는 10여년 전 기억이 퍼뜩 떠올랐다.
1995년의 일이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김씨는 ‘신분증만 있으면 대출해준다’는 신문광고를 보고 대출업자를 찾아갔다. 나씨와의 첫 만남이었다. 나씨는 “대출을 받으려면 신분증이 필요하다”고 했고, 김씨는 선선히 신분증을 건넸다. 나씨는 이 신분증에 자신의 사진을 붙인 뒤 은행을 찾아가 7000만원을 대출받은 뒤 사라져버렸다.
김씨는 이런 사실을 모르고 지내다, 2년 뒤 은행에서 ‘대출 연체금을 갚으라’는 독촉장을 받고 나서야 자신이 사기당한 사실을 깨달았다. 김씨는 나씨를 찾아 뛰어다니기를 12년, 드디어 나씨를 만난 것이다.
김씨는 그길로 나씨를 따라가 돈을 갚으라고 말했다. 김씨는 “혼자 고시텔에서 살고 있어 ‘딸한테 집이라도 구해주게 300만원만 갚으면 다 잊겠다’고 말했다”며 “그런데 나씨가 되레 내 딸 명의로 다시 대출을 받아 사업을 같이하자며 또 사기를 치려고 했다”고 말했다. 결국, 김씨는 지난 14일 서울 종로구 숭인동의 나씨가 운영하는 부동산 사무실을 찾아가 나씨를 흉기로 찌르고 달아났다. 두 사람의 질긴 악연이 끝을 맺는 순간이었다. 김씨를 살인혐의로 붙잡은 서울 혜화경찰서는 20일 구속영장을 신청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경미 기자 km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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