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품업체에 인건비 일부 배상하라” 판결
유통시장의 공룡 격인 대형마트들이 약자인 납품·입점업체들에 판촉사원 파견을 요구하고 그 인건비를 떠넘기는 행위는 위법한 것이라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공정거래위원회의 과징금 부과와는 별개로 민사상 손해배상 책임도 져야 한다는 첫 판결로, 백화점 등 대형 유통업체들의 불공정 거래 관행을 바꾸는 계기가 될지 주목된다.
대법원 3부(주심 안대희 대법관)는 대형마트 까르푸에 황태포 등 수산물을 납품하며 판촉사원 인건비를 대신 지급해온 오아무개(52)씨가 한국까르푸를 인수한 이랜드리테일을 상대로 낸 부당이득금 반환 소송에서 까르푸가 인건비의 상당 부분을 부담해야 한다고 판결하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고 26일 밝혔다. 까르푸는 이랜드리테일에 매각돼 홈에버로 바뀐 뒤, 지난해 다시 삼성테스코에 인수돼 홈플러스로 이름이 변경됐다.
오씨는 1998년부터 2003년까지 까르푸 매장 8~9곳에 황태포와 굴 등을 납품하며 제품 판매를 맡을 판촉사원을 ‘파견’했다. 그러나 사실은 까르푸 쪽이 판촉사원의 채용은 물론 근무시간과 급여까지 정하고 인건비만 오씨에게 부담시켰다. 이 기간에 판촉사원 인건비로 8억2천여만원을 댄 오씨는, ‘우월적 지위’에 있는 까르푸가 △협력사원 파견 강요 △광고비·시식용 제품 비용 전가 △할인 판매 강요와 비용 전가 △일방적 가격 인하 요구 △갑작스런 거래처 변경 등으로 15억5천만원의 손해를 입혔다며, 이 가운데 일부인 2억8500만원을 배상하라는 소송을 냈다.
1심은 증거 부족을 이유로 오씨의 패소를 판결했고, 항소심은 황태포 판매와 무관한 일을 한 판촉사원 1명에 대해서만 일부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일단 제품이 납품되면 그 판매는 까르푸 쪽이 자신의 비용으로 수행해야 할 고유의 업무인데 이를 오씨에게 떠넘긴 것은 거래상 우월한 지위를 이용한 불공정 거래에 해당한다”며 “오씨는 인건비에 해당하는 만큼의 손해를 입었지만, 판촉사원의 활동으로 오씨가 얻은 매출 증대 이익도 있는 만큼 이를 함께 고려해 까르푸의 배상 책임을 다시 심리해야 한다”고 파기환송 이유를 설명했다. 대법원은 파견 강요 이외의 오씨 주장은 이를 인정할 증거가 없다며 상고를 기각했다.
대법원은 “대형 유통업체의 성장이 국민경제에 긍정적 영향을 끼친 것만은 아니다”라며 “이번 판결로 이들의 불공정 거래 행위에 대한 실효성 있는 권리 구제가 가능해졌다”고 평가했다.
이에 대해 납품업체 관계자는 “지금은 일반적으로 판촉사원 인건비를 대형마트와 절반씩 분담하는 등 문제가 상당히 개선됐다”며 “환영할 만한 판결이지만 여전히 약자인 납품업체 쪽이 목소리를 내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말 공정위가 대형마트 등과 거래하는 납품업체를 조사한 결과, 판촉사원 파견 업체 가운데 21%는 대형 유통업체의 강요에 의해 파견했다고 답변했다. 낮은 가격에 납품하라거나 사은품을 제공하라는 강요가 있었다는 답변도 15.2%나 됐다.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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