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일본주의 위반땐 기각”
“북한 공산집단이 정부를 참칭하거나 국가 변란을 목적으로 불법으로 구성된 반국가단체로서 주체사상을 바탕으로 한 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노선에 따라 적화통일을 기본목표로 삼고….”
지난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여간첩 원정화 사건’의 공소장은 ‘북한의 반국가단체성’ 설명으로 시작한다. 이어 원씨의 아버지가 남한으로 침투하다 피살됐다든지 의붓아버지가 군대에서 상을 받은 사실 등이 적혀 있다. 심지어 원씨의 낙태 사실까지 포함돼 있다. 공소사실인 중국과 남한에서의 간첩활동과는 직접 관련이 없는 내용이다.
대법원이 지난 22일 문국현 창조한국당 대표의 상고심 판결에서 공소 제기 단계에서는 법관에게 범죄사실만 적은 공소장만 제출하고 유죄 심증 또는 예단을 형성할 수 있는 내용이나 서류를 첨부할 수 없다는 ‘공소장 일본(一本)주의’ 원칙을 명확히한 전원합의체 판례를 내놔, 검찰의 오래된 공소장 작성 관행이 시험대에 올랐다. 대법원은 “법원은 공소 제기 초기부터 공소장 일본주의 위배 여부를 심사해 위반 사실이 드러나면 공소기각을 하라”고 주문했다. 공소 제기가 적법하지 않으면 실체적 진실은 따져볼 것도 없다는 입장이다.
공소장 작성 방식은, 특히 공안사건에서 원칙을 벗어나는 경우가 많다. 간첩 사건뿐 아니라 찬양·고무 등 다른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에서도 피고인의 성장 배경, 학생회 활동, 읽은 책 등 범죄사실과 관련이 없는 개인의 ‘일대기’가 공소장이라는 이름으로 제출된다. 피고인의 사상적 ‘불온성’을 부각시키려는 이런 공소장은 프라이버시 침해 논란도 일으켜왔다.
수십년 관행을 바꿔야 할 처지에 놓인 검찰은 떨떠름한 표정이다. 한 검찰 관계자는 23일 “공안사건은 이적성이 문제가 되기 때문에 그 사람이 왜 그런 성향을 갖게 됐는지 배경을 기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법원이 입장을 명확히한 이상, 공소사실과 직접 관련이 없는데도 피고인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한 내용을 재판 초기부터 부각시키는 관행은 사라져야 한다는 게 법원의 방침이다.
한 판사는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 공소장은 한 사람의 인격 형성 과정을 모두 기록하는 경우가 많다”며 “이번 판결은 검찰에 주의를 환기시킨 것”이라고 말했다. 법원의 다른 관계자는 “공소장 일본주의가 지켜지더라도 첨부되는 구속·체포 관련 서류에는 범죄사실 이외의 내용이 적히기도 한다”며 “재판부가 검찰의 주장을 걸러서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김남일 노현웅 기자 namfi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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