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 김(44)
미 버지니아주 최초 한국계 하원의원 마크 김
“오늘의 승리는 한인 이민자 모두의 승리입니다”
미국 버지니아주 최초의 한국계 주 하원의원인 마크 김(44·사진)의 지난해 11월 당선 첫 소감이었다. 남북전쟁 당시 남부동맹의 수도였던 리치먼드가 주도인 버지니아주는 남부 기운이 강해 유색 인종이 주의원이나 연방의원이 된 적이 거의 없었다. 더욱이 버지니아는 워싱턴 디시(D.C.)에 인접해 중앙정치의 영향을 많이 받는데, 지난 선거에선 ‘공화당 바람’이 불었다. 그럼에도 그가 당선된 건 오랫동안 선거구민들을 위해 애쓴 노력이 평가받은 것으로 그는 설명했다.
지난주 만난 마크 김은 버지니아주 비엔나 사무실을 막 열고 정리하는 중이었다. 그는 “사람들의 관심이 온통 일자리”라며 “경제회복에 힘을 쏟으면서 특히 한인들이 많은 자영업에 대한 주정부 혜택을 늘리는 방안을 추진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버지니아주는 여당(공화당) 위원장이 상임위원회 선택을 일방적으로 결정하기 때문에 자신이 어느 상임위에 속하게 될지 모른다며 구체적인 의정 계획을 밝히는 것을 조심스러워 했다.
14살때 미국으로 건너가 20대에 정치인 꿈꿔
“한인 종사자 많은 자영업에 혜택확대 추진” 마크 김은 1966년 서울에서 태어난 이민 1.5세다. 베트남과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14살 때인 78년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이민왔다. 그는 일찍 정치에 눈을 떴다. 어바인 캘리포니아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한 뒤, 88년 마이클 듀카키스 민주당 후보 대선 캠프에 자원봉사자로 참여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이후 빌 클린턴, 존 케리, 버락 오바마에 이르기까지 줄곧 민주당 대선 후보 선거 캠프에서 활동했다. 또 로스쿨 졸업 뒤 연방방송위원회와 연방중소기업청 변호사로 일하다 리처드 더빈 민주당 상원의원 수석자문위원, 버라이즌 부사장 등을 거치는 등 많지 않은 나이지만 경력이 화려하다. 정치 입문 이유로, 그는 유년시절을 이야기했다. 4살 때 그는 파월 목사 군목인 아버지를 따라 베트남으로 갔다. 75년 월남 패망 직전, 서울로 돌아왔는데 한국말을 못해 반에서 ‘바보’라는 놀림을 받으며 지냈다. 그는 “이민자들이 미국 땅에 처음 내렸을 때, 말도 제대로 못하는 그 막막함을 일찍 느껴봤습니다. 그리고 이민교회에서 성장하면서 통역, 가이드 등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게 자연스레 제 일이 됐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영어와 한국어에 모두 능통한 1.5세, 고교시절 닭공장 아르바이트부터 로펌 변호사까지의 다양한 경력 등을 바탕으로 앞으로 미 주류사회와 한인사회, 한인 1세대와 2세대, 가난한 사람과 잘 사는 사람 등을 잇는 징검다리 노릇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한인 2세대가 미 주류사회에 적극 진출하는 것이 한국과 미국을 잇는 진정한 길이 될 것”이라며 자신이 ‘롤 모델’이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잊지 않았다. 워싱턴/글·사진 권태호 특파원 ho@hani.co.kr
“한인 종사자 많은 자영업에 혜택확대 추진” 마크 김은 1966년 서울에서 태어난 이민 1.5세다. 베트남과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14살 때인 78년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이민왔다. 그는 일찍 정치에 눈을 떴다. 어바인 캘리포니아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한 뒤, 88년 마이클 듀카키스 민주당 후보 대선 캠프에 자원봉사자로 참여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이후 빌 클린턴, 존 케리, 버락 오바마에 이르기까지 줄곧 민주당 대선 후보 선거 캠프에서 활동했다. 또 로스쿨 졸업 뒤 연방방송위원회와 연방중소기업청 변호사로 일하다 리처드 더빈 민주당 상원의원 수석자문위원, 버라이즌 부사장 등을 거치는 등 많지 않은 나이지만 경력이 화려하다. 정치 입문 이유로, 그는 유년시절을 이야기했다. 4살 때 그는 파월 목사 군목인 아버지를 따라 베트남으로 갔다. 75년 월남 패망 직전, 서울로 돌아왔는데 한국말을 못해 반에서 ‘바보’라는 놀림을 받으며 지냈다. 그는 “이민자들이 미국 땅에 처음 내렸을 때, 말도 제대로 못하는 그 막막함을 일찍 느껴봤습니다. 그리고 이민교회에서 성장하면서 통역, 가이드 등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게 자연스레 제 일이 됐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영어와 한국어에 모두 능통한 1.5세, 고교시절 닭공장 아르바이트부터 로펌 변호사까지의 다양한 경력 등을 바탕으로 앞으로 미 주류사회와 한인사회, 한인 1세대와 2세대, 가난한 사람과 잘 사는 사람 등을 잇는 징검다리 노릇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한인 2세대가 미 주류사회에 적극 진출하는 것이 한국과 미국을 잇는 진정한 길이 될 것”이라며 자신이 ‘롤 모델’이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잊지 않았다. 워싱턴/글·사진 권태호 특파원 ho@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