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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길을찾아서] 좌·우 항일단체의 통합 노력과 분열 / 김자동

등록 2010-01-27 18:42수정 2010-01-31 00:59

1940년(대한민국 22년) 5월 중국 치장에서 한국독립당을 재건하고 기념사진을 찍은 임시정부 요인들. 앞줄 왼쪽부터 김붕준·지청천·송병조·조완구·이시영·김구·유동열·조소앙·차이석, 뒷줄 왼쪽부터 엄항섭·필자의 부친 김의한·조경한·양우조·조시원·김학규·고운기·박찬익·최동오 선생이다.
1940년(대한민국 22년) 5월 중국 치장에서 한국독립당을 재건하고 기념사진을 찍은 임시정부 요인들. 앞줄 왼쪽부터 김붕준·지청천·송병조·조완구·이시영·김구·유동열·조소앙·차이석, 뒷줄 왼쪽부터 엄항섭·필자의 부친 김의한·조경한·양우조·조시원·김학규·고운기·박찬익·최동오 선생이다.
김자동-임정의 품 안에서 19
우리 가족은 중국 자싱에서 1932년 여름 무렵부터 2년 넘게 머물렀는데, 어머니(정정화)는 임시정부의 큰살림을 도맡아 하느라고 늘 바빴다. 반면 하는 일이 단조롭고 답답해 환경을 바꾸고 싶어하던 아버지(김의한)는 생활비도 해결하고 임정에 도움도 줄 수 있는 직장을 구하기로 했다. 그래서 34년 봄 중국 장시(강서)성의 한 지방 관리로 취직을 해 가족이 이사를 했다. 펑청(풍성)현에 있는 장시성 제1구 전원공서라는 곳이었다.

중국의 성은 대개 남북한을 합친 면적보다 더 넓고, 성장은 흔히 성내의 군권까지 쥐고 있어 중앙의 지시가 제대로 안 통하는 사례가 많았다. 그래서 국민당 중앙정부는 각 성에 몇개의 전원공서를 두고 전원을 파견해 주변 몇개의 현을 관장하게 했다. 아버지는 여기에 취직하려고 중국인으로 행세했다. ‘천하이’(진해)라는 중국 이름을 사용했으며, 서울의 집 앞에 흐르던 청계천을 떠올려 ‘칭치’(청계)라는 호를 썼다. 나도 ‘천밍’(진명)이란 중국 이름을 썼다.

펑청에서 밤기차를 타면 다음날 아침 항저우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우리가 펑청에 있는 동안 성재 선생도 우리집에 와서 얼마간 함께 지내기도 했다. 그러다 제1구 전원공서가 펑청에서 장시성 서북부의 우닝(무령)현으로 이전함에 따라 우리도 1년도 못 되어 이주했다. 우리 가족은 중일전쟁이 터져 후난성 창사로 옮겨간 임정과 38년초 합류할 때까지 우닝에서 3년 가까이 지냈다. 자싱과 항저우에 있던 임정 산하 정당들은 우리 가족이 장시성으로 옮긴 뒤인 35년 당시 수도인 난징으로 이전했다. 임정 창립 이후 10여년 사이 국외 항일투쟁세력 중에서 좀더 급진적인 단체들은 임정을 외면한 채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형편이었고, 정당·단체들도 여러 개로 나뉘어 있어 이들을 통합하려는 움직임이 진행됐다.

30년(대한민국 11년) 1월 상하이에서 한국독립당이 창설되었다. 초대 이사장에는 이동녕, 이사에는 김구·조완구·김철·안창호·이시영·조소앙이 선임되었다. 상하이 지역에서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경향의 민족주의 지도자들은 총망라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이분들이 사실상 임정의 여당인 셈이었다. 하지만 32년 한독당의 주요 간부들은 임정과 함께 자싱과 항저우로 탈출했으나 당원 상당수는 상하이에 남아 있어 한독당의 활동은 자연 저조해졌다.

좌우를 망라한 항일운동단체의 통합 노력이 계속되어 35년 5월 난징에서 한국독립당·조선의열단·미주대한독립당·조선혁명당·신한독립당 등 다섯 단체가 민족혁명당으로 통합했다. 이 과정에서 한독당은 조소앙 중심의 다수파가 당을 해체하고 민혁당에 참여했으나 상당수는 합류하지 않았다. 그리고 5당 통합에 처음부터 회의적이었던 한독계가 중심인 민족주의 세력은 같은 해 11월 한국국민당을 항저우에서 창립했으며, 이사장으로는 백범이 선출됐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그때까지 정당과 관련이 없던 부모님도 국민당에 참여했다. 민족혁명당은 창립 초기부터 의열단계가 주도권을 장악했으며, 여기 참여했던 조소앙 등 한독당 계열은 두 달도 못 되어 민혁당을 탈퇴하여 한독당을 재건했다. 37년 1월 민혁당 전당대표회의에서 김원봉을 총서기로 선출해 의열단계의 주도가 더욱 강화되자, 만주에서 난징으로 옮겨온 무장투쟁 지도자 백산 이청천, 의산 최동오 등도 민혁당을 탈당해 조선혁명당을 다시 조직했다. 이로써 한동안 한독당과 조선혁명당의 재건과 더불어 국민당이 임정을 지지하며 이끌어 나갔다. 37년 중일전쟁이 터진 이후 이 3당은 다시금 통합을 시도하다가 일단 그해 8월1일 난징에서 대한인국민회·한인애국당·대한부인구제회와 더불어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약칭 한국광복진선)를 결성하는 것으로서 임정 산하 단체의 연합체가 성립되었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민혁당 등 임정에 참여하지 않은 단체들도 조선민족해방전선(약칭 민족전선 혹은 해방전선)이란 연합체를 조직했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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