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여름 필자의 부친(김의한)이 장시성 우닝현의 쑨원 기념 중산도서관장으로 일할 때 도서관 앞에서 찍은 가족사진. 앞줄 왼쪽 셋째부터 막내고모·모친(정정화)·부친·사촌형 석동, 부친 앞의 소년이 필자다.
김자동-임정의 품 안에서 22
1932년 봄 우리 가족이 자싱으로 피신하면서 상하이에 살 때 매달 할머니 등 국내 가족에게 보내던 약간의 송금마저 끊어야 했다. 그렇게 어려운 형편에도 큰숙부(용한)가 별세한 뒤 어린 나이에 가장의 책임을 맡게 된 작은숙부(각한)는 할머니를 모시면서 막내여동생의 학업을 계속시켰다.
막내고모(영원)는 재능이 있어 공부도 잘했고, 할아버지(김가진)를 닮았는지 글씨도 잘 써 전국학생서예대회에서 1등을 한 일도 있다. 고모는 민족의식과 반항적 기질이 있어 재학 중 경찰에 잡혀간 일도 더러 있었다. 그때마다 일본 경찰에서는 우리 집안이 알려지는 것을 꺼려 훈방조처했다고 한다. 고모는 졸업 뒤에도 계속 후배들을 지도하는 등 항일활동을 벌여 골칫거리였던 모양이다. 어쨌든 어느 날 담당 형사가 집에 찾아와 할머니에게 “그렇게 살려면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는 오빠에게 가서 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했다 한다. 그래서 할머니가 “가겠다면 보내 주겠느냐?”고 물었더니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는 것이었다.
억울하게도 김상옥 의사 사건에 연루되어 고문을 받은 여파로 큰숙부가 한강에 투신자살한 뒤 아들 하나를 데리고 살던 숙모도 34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유언으로 아들을 중국에 있는 큰어머니에게 맡겨서 키우길 부탁했다. 우리 어머니에게 맡기면 친자식같이 키우리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막내고모와 내 사촌형 석동이 이렇게 해서 36년 봄 상하이를 거쳐 난징까지 오게 됐다. 난징에서 몇 달을 더 머무른 뒤 그해 여름 우리 가족은 난징을 떠나 다시 장시성으로 옮겨갔다. 이때부터 석동형도 중국 이름인 천웨이로 행세했다. 서울에서 교동보통학교를 졸업한 형은 우닝에서 중학교에 다녔다. 그리고 부모님은 고모를 설득해 36년 말 국내로 돌려보냈다.
부모님은 아마도 그때의 형편으로는 고모가 당장 중국에서 할 일도 별로 없으며, 귀국하여 더 늦기 전에 시집가는 것이 고모를 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고모도 나름대로 큰 뜻을 갖고 오빠를 찾아왔으나 오빠가 중국 시골에서 월급쟁이나 하고 있는 것이 무척 실망스러웠던 것 같다.
나는 소학교 4학년이던 37년쯤부터 신문과 잡지를 읽는 버릇을 갖게 됐다. 집에서 보는 신문과 잡지를 읽으며 흥미를 갖게 된 것이다. 특히 기억나는 것은 그때 집에서 <세계지식>이란 월간지를 구독했는데, 이 잡지는 국제정세를 알기 쉽게 보도할 뿐만 아니라 사건의 배경과 그 지역에 관한 소개를 쉽게 풀어서 설명했다. 이 잡지를 접하면서 나는 세계정세와 지리에 흥미를 갖고 공부하게 됐다. 이렇게 해서 나는 10살 나이에는 드물 정도로 박식해진 셈인데, 여기에는 무엇보다 어머니의 도움이 컸다. 독립되어 고국에 돌아가는 것이 어릴 때부터의 숙원이었으므로 어린 나이에도 일본의 계속되는 침략에 대항하여 중국이 하루라도 빨리 항일전쟁을 전개하기를 바랐다.
이런 바람은 중국 정세에 관심을 갖는 것으로 출발하여 일본과 동맹관계에 있는 독일과 이탈리아의 침략행위와 스페인 내전 등에까지 나의 관심을 넓히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해가 잘 안되는 문제는 늘 어머니에게 물었다. 어머니는 때로 도서관을 찾아가 공부를 하면서까지 내 궁금증을 푸는 데 도움을 줬다. 마침 그때 아버지가 우닝현 중앙도서관 관장직을 맡고 있었다.
37년 7월7일 베이핑(지금의 베이징) 근교 남서쪽에 있는 유서 깊은 루거우차오(노구교)라는 다리 근처에서 중국과 일본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다. 사건의 전모는 이렇다. 당시 이 지역에 불법 진주해 있던 일본군에서 이날 밤 야간훈련 중 병사 한 명이 행방불명됐다. 그날 밤 몇 발의 총성이 들렸는데 이것이 충돌로 생긴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8일 새벽에는 일본군이 다리를 지키고 있는 중국군을 기습공격하여 루거우차오를 점령했다. 이 지역에 주둔중인 쑹저위안(송철원) 휘하의 29군은 화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용감히 응전하여 결국 중-일 사이에 전면전까지 일어나게 된 것이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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