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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길을찾아서] ‘항일투사’ 안 의사 사촌, 박정희 정권서 탄압 / 김자동

등록 2010-04-04 18:30

안중근 의사의 근자 항렬 사촌형제 11명과 생자 항렬 조카 22명 중에는 항일투쟁에 헌신한 지사들이 많다. 안 의사의 동갑내기 사촌동생 명근(왼쪽 사진 뒷줄 오른쪽) 선생은 데라우치 총독 암살을 도모하다 1911년 ‘105인 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옥고를 치른 투사였다. 당시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뮈텔(오른쪽 사진) 신부는 명근 선생의 총독 암살계획을 총독부에 제보했다.
안중근 의사의 근자 항렬 사촌형제 11명과 생자 항렬 조카 22명 중에는 항일투쟁에 헌신한 지사들이 많다. 안 의사의 동갑내기 사촌동생 명근(왼쪽 사진 뒷줄 오른쪽) 선생은 데라우치 총독 암살을 도모하다 1911년 ‘105인 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옥고를 치른 투사였다. 당시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뮈텔(오른쪽 사진) 신부는 명근 선생의 총독 암살계획을 총독부에 제보했다.
김자동-임정의 품 안에서 64
안중근 의사의 근친 중에도 항일 독립투쟁에 참여한 이들이 많았다. 가장 유명한 분은 안악사건의 주인공인 사촌동생 명근 선생이다. 명근 선생은 1909년 안 의사의 하얼빈 거사 뒤 동지들과 더불어 매국 역적 이완용 등을 죽이고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을 양성할 계획을 세우고 군자금을 모금하던 과정에서 탄로나 체포됐다.

일제는 이 사건을 확대해 황해도를 중심으로 서북 각지 요시찰인 160명을 체포, 105명을 재판에 회부하는 소위 ‘105인 사건’으로 조작했다. 실제로 이 계획에 참여한 사람은 배경진·박만준·한숙직, 그리고 압송 도중 재령철교에서 투신자살한 신석충 진사 등 몇명에 불과했다. 그런데 일제는 이를 서북지방의 위험인물을 일망타진하는 기회로 이용해, 터무니없이 확대한 것이다.

이때 백범은 김구(金龜)라는 이름으로 양산학교에서 기거하고 있었는데, 같은 학교 교직원 김홍량·도인권 등 거의 전원을 비롯해 안악군 내 인사만 20명 정도 잡혀갔다. 그중에는 후일 백범의 평생 동지가 된 양산학교의 생도 최중호도 있었다. 체포된 사람 대부분은 황해도 출신이었으며, 평안도 출신으로는 안태국·옥관빈·이승훈·유동열 등이 있었고, 경성의 양기탁, 함경도의 이동휘 등 후일 임시정부의 총리직을 맡게 되는 인물도 포함돼 있었다. 명근 선생은 이 사건으로 10년 옥살이를 한 뒤 만주로 망명해 항일투쟁을 벌이다가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명근 선생 슬하에 의생과 양생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해방 이후까지 중국에서 생활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외에 사촌동생 봉근 선생과 경근 선생도 만주로 건너가 항일투쟁에 참여했다. 봉근 선생은 그 후 독일로 건너갔으며, 해방 뒤 귀국 도중 병사했다. 봉근 선생의 아들 민생은 만주에 머물며 젊은 나이에 항일 유격대에서 활동하다가 포로로 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옥살이를 했다. 경근 선생은 일본이 만주를 강점하자 난징으로 다시 왔다. 우리가 35년 난징에서 백범의 모친과 함께 지낼 때 안 선생이 자주 들러 내 부모하고도 그때부터 가까운 사이가 됐으며, 나도 어려서부터 그분을 아저씨라고 부르며 귀여움을 받고 지냈다. 경근 선생은 충칭에 있을 때에도 우리 가족과 자주 내왕했다.

61년 봄, <민족일보> 기자로 일하던 나는 3·15 마산 의거 1돌 기념행사를 취재하려고 마산에 들른 뒤, 경남·북 일대의 농촌 형편을 취재하던 중 대구에 들러 경근 선생을 찾아뵌 적이 있었다. 그때 선생은 민족자주통일연맹의 경북지구 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20년 전 내가 아직 중학생일 때 마지막으로 봤었는데도 얼른 알아보고 “너 의한이 아들이구나” 하고 반가워해주셨는데, 그 뒤로는 다시 만날 기회가 없었다. 그때 마침 민생도 함께 있어 처음 인사를 하게 됐다. 그리고 불과 2개월 뒤 5·16 군사반란이 터져, 경근 선생과 민생은 친북·용공의 죄목으로 체포돼 박정희 치하에서 옥고를 치렀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안 의사의 근친 중에서 나와 가장 오랫동안 가까이 지낸 분은 당질인 춘생이었다. 춘생도 경근 선생과 함께 만주에서 다시 중국 관내(장성 이남)로 망명해 난징에 와서 지냈다. 그는 만주에서 제대로 학업을 받을 기회가 없었는데도 머리도 좋고 노력을 했기 때문에 난징에 와서 고졸도 들어가기 힘든 중앙군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역시 난징에 있을 때 내가 살던 집에 자주 들렀던 것 같은데 그때 일은 자세한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39년 초 우리 가족이 피난지인 창사에 도착할 때부터는 자주 만났으며, 나를 귀여워해준 기억이 난다. 중-일 전쟁이 터진 다음 달인 37년 8월, 일본이 상하이를 침공하자 춘생은 자원 출전해 다리에 부상당한 일이 있으며, 중국군에 복귀했다가 광복군이 창립되자 제대하고 한국의 군인이 되었다. 광복군에서는 주로 제2지대에서 일했는데, 노백린 장군의 아들 태준 형과 더불어 지대장인 철기 이범석 장군의 좌우팔의 노릇을 했다. 해방 이후 귀국해 군에 입대해 중장까지 진급했다. 현역 시절은 물론 전역한 뒤 국영기업의 장으로 있을 때도 청렴한 처신으로 널리 알려진 분이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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