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는 1941년 11월 이후 중국 군사위원회에 예속됐던 광복군의 지휘권을 줄기차게 요구해 44년 8월 당시 중국군 참모총장 허잉친(왼쪽)으로부터 ‘취소’ 통보를 받아냈다. 그 무렵 필자는 ‘윤봉길 도시락 폭탄’을 제조해준 김홍일 장군(오른쪽)의 둘째 아들과 같이 충칭 부근 장진의 중학교에 다녔다.
김자동-임정의 품 안에서 65
앞서(제46회) 말했듯이, 광복군은 출범한 지 얼마 안 되어 국민당 정부의 요구(9개 준승)대로 중국 군사위원회 지휘 아래로 들어가게 됐다. 그러나 여러 가지 객관적 조건과 더불어 중국군 자체의 비능률적인 추진력까지 겹쳐 광복군의 활동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임시정부에서는 중국 쪽에 ‘9개 준승’의 폐지를 계속 요구했다. 특히 1941년 통합된 임시의정원에서는 이전보다 다양한 목소리가 나오기 마련이었으며, 점차 격한 불만의 발언들이 나왔고 이를 중국 당국도 알게 됐다이러다가는 여러 해 다져온 두 정부 사이의 우의에 금이 갈 수도 있다는 것을 인식한 중국 쪽은 결국 우리 요구를 받아들여 광복군 지휘권을 돌려주기로 했다. 우리가 ‘준승’을 받아들인 지 3년이 지난 44년 8월23일, 중국은 군사위원회 허잉친 참모총장 명의로 임정 주석에게 공한을 보내 9개 준승을 취소한다는 통보를 해왔다. 이어 10월7일 임정은 ‘9개 준승’의 취소에 따라 필요한 후속조처를 담은 ‘관어한국광복군환문초안’과 ‘위광복군당면요구조건’을 중국 쪽에 제출했다. 광복군이 중국 영토 안에 있을 때에는 ‘중국 항전에 배합해 대일작전에 참가’하고 ‘중국 통수의 지휘를 받을 것’을 조건으로, 중국이 광복군에 대한 원조를 계속해 달라는 요구였다. ‘환문초안’은 원조에 대한 광복군의 의무와 차관이라는 원조 형태를 제시한 것이고, ‘요구조건’은 원조의 규모와 범위를 규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중국 쪽에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이유에 대해 한시준 교수는 그의 저서 <한국광복군 연구>에서 “임정을 정식으로 승인하지 않고 있던 중국이 차관 형식의 원조 요구를 줄 수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135쪽)는 견해를 제시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지만, 모든 것을 임정이 요구한 대로 받아들이기 싫어서 중국이 일단 제동을 걸었을 가능성도 있다. 어쨌든 이런 사정으로 중국 안에서 한국광복군의 지위는 그해 말까지 표류하고 있었다. 앞서 말한 대로 43년부터 우리 식구는 모두 충칭 시내로 이주했으나, 개학에 맞춰 나는 투차오로 다시 돌아와야 했다. 어머니는 교통이 불편한데도 충칭과 투차오 사이를 오가며 두 집 살림을 돌보았는데, 나 때문에 투차오에 머무는 시간이 더 많을 수밖에 없었다. 투차오에는 한독당계 가족들을 위해 지은 집 3채가 있었는데, 맨 아랫집에 삼강 신환(신건식), 일파 엄항섭, 의사인 광파 유진동 선생의 가족과 우리 식구 등 네 가족이 살고 있었다. 일파의 자녀들과는 그러잖아도 늘 함께 놀고 공부하며 지내는 사이였으므로 나 혼자 있을 때에는 끼니도 그 집에서 해결한 적이 많았다. 44년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부터는 아예 투차오의 우리 방은 잠가놓고 나도 충칭 시내로 옮겨가 한독당 당사에 딸린 방으로 완전 이주했다. 이어 9월 나는 기숙사가 있는 장진(江津) 국립제9중학(초중 3년·고중 3년의 6년제)으로 전학했다. 장진현은 충칭에서 서쪽으로 창장강을 약 100㎞ 거슬러 올라간 곳에 있는, 인구가 10만명이 넘는 제법 큰 읍이었다. 그때는 충칭시와 마찬가지로 쓰촨성에 속해 있었는데, 현재는 충칭직할시 장진시가 됐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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