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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길을찾아서] 애국지사 고중민 선생 안타깝게 옥사 / 김자동

등록 2010-04-13 18:40수정 2010-04-14 08:30

1958년 이승만 대통령 암살 미수사건의 범인으로 체포된 고중민(김중민·가운데) 선생이 재판을 받고 있다. 일제 경찰에서 해직당하고 독립운동에 가담한 특이한 이력의 그는 결국 대구에서 옥사했다.
1958년 이승만 대통령 암살 미수사건의 범인으로 체포된 고중민(김중민·가운데) 선생이 재판을 받고 있다. 일제 경찰에서 해직당하고 독립운동에 가담한 특이한 이력의 그는 결국 대구에서 옥사했다.
김자동-임정의 품 안에서 71
앞서도 얘기했듯이 우리 가족은 1943년 여름부터 충칭시 허핑루에 있는 한독당사에 딸린 방에서 살았다. 이때 아버지는 새로 사귄 고중민 선생을 자주 집으로 데려와서 저녁식사도 함께 했다. 그는 국내를 떠난 지 1년밖에 되지 않아 최근의 국내 정세를 우리 가족에게 소상히 얘기해 주었다. 고 선생은 일본 경찰에서 일한 적이 있는데, 그때 사상범으로 잡혀 온 학생을 감싸준 문제로 해직당했던 것이다. 그는 일본 치하의 베이징에서 중국 국민당을 위해 지하활동을 하고 있었던 김재호 선생을 찾아갔다고 한다. 그리하여 중국 국민당 지하조직의 경로를 통해 충칭까지 온 것이다. 그는 충칭에서 1년 정도 지낸 뒤 국내에 잠입해 공작할 것을 자청해, 충칭으로 올 때 이용했던 국민당 지하조직을 통해 난징까지 갔다. 그곳에서 난징의 중앙대학에 유학중인 한국 유학생들과 접촉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탄로나 고 선생과 유학생들이 모두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난징 주재 일본영사관 주관하에 조사를 받았다.

나는 해방 이후 귀국해 이때의 중앙대학 유학생 대부분을 사귀게 됐는데, 그중 송지영·조일문·신영묵 세 분과 가깝게 지냈다. 특히 신영묵씨는 충칭 시절 임정 외교부장 조소앙 선생의 비서로 있었으며, 임정 요인들이 귀국한 뒤에는 한때 투차오에 있으면서 매일 농구와 수영을 나와 함께 하며 지내기도 했다. 그는 귀국 뒤에도 계속 조 선생의 비서로 일했으며, 우리 가족과 가까이 지내며 사촌형 석동의 결혼식에 들러리를 서기도 했다. 50년대 후반부터는 나와 아주 가까이 지냈으며, 60·70년대에는 매주 두세번씩 만날 정도였다.

신영묵씨는 회고하길, 고 선생과 함께 유학생들이 체포되었을 때 난징 중앙대학에 교환교수로 와 있던 일본인 교수가 영사관을 설득해 결국 학생 중에는 송지영씨 한 명만 재판에 회부되고 나머지는 전원 훈방됐다고 한다. 그 사건 이전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로 일했던 송씨는 동아일보가 강제 폐간될 때 일제가 직원 모두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주자 취업 대신 중국 문학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유학시켜 줄 것을 요청해 중앙대학에 온 것이다. 그래서 다른 학생과는 달리 단순한 젊은 학생으로 볼 수 없다고 하여 주모자로 지목하는 바람에, 고 선생과 함께 기소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일본 나가사키 형무소에서 해방될 때까지 약 1년간 옥살이를 했다. 그는 귀국한 뒤 중국문학가로서 어느 정도 명성을 얻었으며, 6·25 전쟁이 나기 전까지 <한성일보> 기자, <태양신문> 편집국장 등을 지냈다. 나는 그즈음 송씨를 소개받았으며, 그 후 나 역시 <조선일보> 기자로 일하게 되면서 더욱 가까이 지냈다.

고중민 선생의 본명은 김병호였는데, 귀국 뒤에도 중국에서 사용하던 가명 그대로 ‘김중민’이란 이름을 썼다. 그는 해방정국에서 조소앙 선생과 같은 노선을 따라 한독당에 있다가 사회당에 참여했다. 고 선생은 우리가 귀국한 뒤에도 아버지와 계속 가까이 지냈으며, 내가 기자로 일하던 <조선일보> 지하의 ‘은마차’라는 다방에 자주 들렀기 때문에 그곳에서 만나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고 선생은 58년 무렵 이승만 암살음모사건으로 체포되어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이때 함께 체포된 사람 가운데 김재호 선생의 차남은 현역 군인이었으므로 군법회의에서 사형판결을 받고 처형당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4·19혁명으로 전원 자유의 몸이 됐는데, 가장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나이에 능력도 갖춘 고 선생만 아깝게 희생된 것이다. 김재호 선생도 해방 이후 한국독립당에 관여했으며, 석방된 뒤 나와 여러 차례 만난 일이 있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고 선생은 43년 임정의 지령대로 귀국해 국내 공작을 했어야 했는데, 그만 난징에서 차질이 생겨 원래의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다. 그때 그가 귀국했다면 아마도 몽양 여운형 선생 같은 분과 접촉했을 것으로 믿어지며, 그렇게 됐다면 해방 이후의 정치상황에도 상당한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백범과 몽양은 상하이 시대에는 가까운 사이였지만, 해방 이후 몽양이 임시정부의 존재를 무시한 채 ‘조선인민공화국’ 정부를 세운 것 때문에 백범과 처음부터 협조하기 힘든 처지였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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