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6월26일 미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 대표들이 샌프란시스코 회의를 마치고 ‘국제연합(유엔) 창립 헌장에 서명하고 있다. 당시 임시정부는 대표단을 파견해 참가하려 했으나 미주 한인단체들의 분열로 ‘가입 승인’을 받지 못했다.
김자동-임정의 품 안에서 74
유럽에서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1945년 4월25일부터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는 국제연합을 창설하기 위한 국제회의가 개막됐다. 공식 명칭은 ‘국제기구 창설에 관한 연합국회의’(United Nations Conference on International Organization)였다. 이것은 2주 전에 별세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제32대 대통령이 구상하고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국제연맹을 대체하는 국제기구의 창설을 위한 모임이었다. 임시정부에서는 김규식 부주석을 수반으로 이 회의에 참석할 대표단을 파견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미국 정부의 거부로 참석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 회의에 한국이 참석하여 연합국의 일원이 됐다면 해방 이후 우리나라의 운명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아직까지 널리 알려지지 않은 그때의 상황을 살펴보려 한다. 임시정부가 이승만 박사를 주미대표부의 위원장으로 임명한 것은 잘못이었다고 나는 확신한다. 애초 이 박사가 카이로 회담에 앞서 미국에 상주하는 쑹쯔원(송자문) 중국 외교부장의 권고를 받아들여 한길수·김용중 등 다른 한인단체들과 협력했다면 루스벨트가 그 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적당한 시기’ 대신 ‘최단시일 내’로 주장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샌프란시스코 회의에 앞서 미국은 재미 한인사회, 특히 이 박사에게 새로운 기회를 준 것으로 보인다. 충칭에서는 당시 이미 각 정파가 임정에 모두 참여하여 연립정부를 구성한 상태였다. 이에 맞춰 미 국무부에서도 미국 내 한인들의 연합체 구성을 희망하고 지원하려 했다. 재미한족연합회를 대표하는 김용중과 민족혁명당을 대표하는 한길수도 그것이 미국뿐만 아니라 이제 곧 탄생할 국제연합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길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리하여 국무부 당국의 지원하에 미국내 각 파를 통합하는 ‘통일한인위원회’(United Korean Committee)의 구성이 합의되었다. 국무부에는 한국 문제에 정통한 조지 매큔 박사가 관리로 있었다. 그는 선교사의 아들로 평양에서 출생했으며 우리말에 능통했다. 그는 얼마 전까지도 우리나라의 모든 지명에서 사용한 한글의 로마표음 규칙인 ‘매큔·라이샤워 시스템’의 공동개발자이기도 하다. 그는 또 도산 안창호 선생을 비롯한 김호·한시대 등 재미 한인 지도자 대부분과도 친교가 있었으며, 한인사회의 성향을 두루 파악하고 있었다. 이 박사는 매큔을 미워했던 것 같다. 어쨌든 이 박사의 고집스러운 반대로 이 위원회는 깨지고 말아 한국의 유엔 창설회의 참석이 수포로 돌아간 것이다. 샌프란시스코 회의는 두달간 계속되었으며, 6월26일 유엔헌장에 51개 나라가 서명해 유엔이 창설되었다. 이로써 일본의 패망과 더불어 우리가 자동적으로 독립국이 될 기회를 상실했고, 북한과 남한은 1991년에야 각기 160·161번째 회원국이 되었다. 독일과 전쟁이 끝난 마당에 유럽의 전후문제를 처리하는 동시에 일본에 대한 최후통첩 등의 조처를 위해 미·영·소 3국 수뇌는 베를린 서부 교외의 포츠담에서 회의를 열었다. 미국은 루스벨트의 후임인 트루먼 대통령이 참석했다. 그리고 영국은 회의 도중에 치러진 선거에서 보수당이 패배하고 노동당이 다수를 얻게 되어 처칠 총리의 후임으로 클레멘트 애틀리 노동당수가 신임 총리로 교체되기도 했다. 사람만 바뀐 것이 아니라 분위기도 달라졌다. 테헤란 및 얄타회담 때와는 달리 서로 대립하는 사례도 많았다. 유럽에서의 평화협정에 관해서는 원칙만 논의됐으며, 구체적인 사항은 외무장관회의에서 취급하도록 넘겼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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