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22일 시민들의 힘으로 계엄군을 물리친 광주는 ‘5일간의 해방’을 맞았다. 대인시장과 양동시장 상인들은 돈과 쌀을 내서 주먹밥을 지어 시민군과 학생들을 지원했다. <오월, 민주주의의 승리>에서 황종건
아들 찾다 ‘총쏘는 군인’ 대면
쫓기는 학생들 가게 안 피신
“무서웠어…그래도 도와야제”
쫓기는 학생들 가게 안 피신
“무서웠어…그래도 도와야제”
[5·18 30돌-5월을 지켜온 여성들] ⑦ 김동심 광주 대인시장 ‘고추방앗간집 아줌마’ 김동심(62), 그는 처음 소문으로만 ‘5·18’을 들었다. 장사로 하루하루 먹고사는 데 바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몰랐고, 관심도 없었다. 그런데 이튿날부터 시장 골목 안까지 학생들의 구호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최루탄 냄새가 퍼져 눈이 매워지기 시작했다. 공수부대가 와서 학생들과 시민들을 잡아가고 때리고 야단났다는 소리에 사달이 나도 뭔가 단단히 난 듯했다. 무서운 생각에 골목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손님이 없어 장사를 접고 가게 문을 닫았다. 온 식구가 가게에 딸린 방에서 지냈는데 하루는 중학교 2학년 큰아들이 나가고 없었다. 금방 오겠지 했는데 저녁 내내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다 광주역 앞에 죽은 중학생 주검이 버려져 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도저히 혼자서는 갈 용기가 없어서 남편과 같이 가서 확인했다. 다행히 아들은 아니었다. 뒤늦게 돌아온 아들은, 호기심에 금남로 쪽으로 나가려다 군인들이 어찌나 총을 많이 쏘던지 무서워서 혼자 빠져나오지 못하고 시위대 뒤를 따라다녔다고 했다. 겨우 안도의 숨을 돌리고 있자니 시장 골목으로 공수부대에 쫓긴 학생들이 몰려왔다. 우르르 달려오는 학생들을 엉겁결에 불러들이고 가게 셔터문을 내렸다. 몇시간인가를 숨을 죽인 채 기다렸다가 공수부대들 기미가 사라진 뒤 내보냈다. “아조 난리 속이 되아갖고 쫓아댕기고 쫓겨다니고… 학생들은 담박질로 우르르하니 쫓겨오고 (공수부대는) 몽둥이 들고 쫓아오고… 학생들이 들어오면 셔터문 딱 내려불고… 그라믄 군인들이 지나갔제.” 그때부터 골목골목 공수부대가 모여 있는 것만 보면 가슴이 떨려 쥐어짜는 듯했다. 공수부대원들이 몽둥이를 들고 돌아다니면서 젊은이만 보면 두들겨 패서 차에다 싣고 갔다. 여자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날 자고 일어나 보니 온 도시가 조용해졌다. 군인들은 어디로 갔는지 안 보였다. 금남로에 불탄 차들이 널려 있고, 그 옆으로 죽은 사람들이 신문지에 덮여 있었지만 누가 치울 생각도 안 하고, 말 그대로 전쟁터였다.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아팠다. “장사할 궁리고 뭐고 마음은 모다 거리에 가 있었어. 손님들도 물건 살 생각은 안 하고 시내에서 사람이 죽고 잡혀갔다는 얘기에 걱정만 나누다 갔으니께.” 그러다 시민군들이 등장했다. 처음엔 겁도 났지만 내 자식 같고 동생 같아서, 동네 슈퍼에서 빵과 우유를 사다가 차를 타고 지나가는 차에 던져줬다. 누가 시작했는지는 몰라도, 시장 골목에서 아주머니들이 솥을 걸고 밥을 짓고 있었다. 김동심도 자연스럽게 일손을 보탰다. 김에 주먹밥을 싸서 도로로 나가 있다 시민군들이 지날 때면 전해주곤 했다. 차츰 조를 짜서 밥을 하기도 하고, 물을 떠다 주고, 하루 종일 주먹밥을 싸는 일을 나누어 하기도 했다.
금남로에서 한 구역 안쪽에 자리한 대인시장과 금남로 끝자락에서 가까운 양동시장의 상인들은 ‘5·18’ 당시 시민군에게 먹을거리와 갖가지 물품을 자발적으로 제공하며 ‘보급창고’ 구실을 했다. 그는 지금도 대인시장을 지키고 있다. 30~40년 단골손님들이 올지 몰라 문을 닫을 수 없다. 그동안 시장 바로 옆에 백화점이 들어서고 상권의 중심이었던 전남도청과 광주시청도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곳곳에 대형마트가 생기면서 시장은 예전의 이름값을 못한다. 새로 시장에 들어올 사람이 없어 떠나고 싶어도 못 떠나는 이웃이 많다. 밥벌이도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도 5월 그때에 비하면 세상이 많이 좋아졌다는 그는 못 배운 한을 풀고자 환갑 넘어 검정고시 학원에 등록했다. ‘여자라는 이유로’ 학교에 보내주지 않아 꿈도 뭣도 없이 살았던 세월이 억울해 어렵게 마음을 먹었다. “나이가 있은게 그런가, 머리에 잘 안 들어와. 배워봤자 까먹어불고 그래. 그래도 하루에 한 글자씩만 배우고 댕기자 했어, 그렇게 다녔어.” 장사를 하면서 배우는 일이 녹록하지 않다. 그래도 그는 그만둘 생각이 없다. 5·18 때 무섭고 힘들어도 시장을 떠나지 않고 만들었던 주먹밥이 큰 힘이 된 것처럼 지금 이 자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사는 것이 가치있는 삶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리 광주전남여성단체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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