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1월18일 국회 광주특위 위원들이 ‘5·18’ 당시 공수특전단 11여단이 주둔했던 광주시 동구 주남마을 뒷산에서 암매장 주검 발굴 현장을 검증하고 있다. 주남마을의 비극은 ‘5월23일 학살사건’의 유일한 생존자 양금숙씨의 청문회 증언 등으로 뒤늦게 속속 확인됐다. <광주일보> 보도 사진
군인들 주둔하며 ‘광주 봉쇄’
통행인·차량엔 무차별 총격
“이제는 다 말해도 될틴디…”
통행인·차량엔 무차별 총격
“이제는 다 말해도 될틴디…”
[5·18 30돌-5월을 지켜온 여성들]
⑧ 김막님 광주시 동구 월남동 주남마을 주민 김막님(76), 그는 열일곱에 이 마을로 시집왔다. 오빠 아는 사람의 중매와 부모의 성화에 떠밀리듯 결혼한 지 2년, 겨우 낯을 익힐 즈음 남편은 군대를 갔다. 남편은 “당신이 엄청 못생겨서 말뚝을 박는다”는 핑계를 대더니 8년을 더 군대생활을 했다. 그사이 어린 새댁은 홀로 시부모 봉양하고 아이들을 키우며 이 마을 억척 아줌마로 터를 잡았다. 1980년 5월21일, 공수부대원들이 주남마을에 처음 들어왔을 때 김막님은 마을 앞 하천둑 공사장에서 시멘트를 나르는 일용근로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미 18일부터 계엄군의 학살과 시위대의 저항으로 광주시내는 ‘전쟁’이 난 터였지만, 변두리인 까닭에 소문으로만 알고 일상에 몰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공사 뒤처리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콩볶듯 총소리가 울렸다. 그러자 작업반장인가 누군가가 소리를 쳤다. “지금 난리가 났다. 하던 일 다 치우고 얼른 집으로 가라.” ‘피의 초파일’로 불리는 그날 이후 항쟁 기간 내내 광주에서 화순으로 나가는 길목에 자리한 주남마을은 계엄군과 시민군이 치열한 접전을 벌인 요충지가 됐다. 그날 낮 도청과 광주역 일대에서 계엄군의 발포가 시작되자 맨손 저항의 한계를 느낀 시민들은 무기를 찾기 시작했다. 주남마을 인근 너릿재 너머의 화순광업소를 비롯해 화순 역전파출소와 동면 지서의 무기고를 접수해 무장한 시민군들은 반격전을 벌였다. 오후 4시30분께 계엄군은 도청과 도경 상황실을 내주고 물러났고 공수특전단 11여단은 주남마을 뒷산에 본부 진지를 구축했다. 김막님은 계엄군이 들어온 그날 밤을 잊지 못한다. 저녁 8시 이후 집 밖으로 나온 사람을 향해 무조건 총으로 쏴댔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유탄을 피하기 위해 밤새 솜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을 설치다 날이 밝은 뒤에야 나갈 수 있었다. 모내기철이 막 지난 터라 못자리에 물을 충분히 봐줘야 했지만 무서워 들에 나갈 수가 없었다. 결국 그해 농사는 망쳐 이웃에서 쌀을 꿔다 먹어야 했다. “그때 마을에 군인들이 걍 꺼맸어라, 꺼매. 바우(바위) 있는 데서 절 있는데까장(까지) 꺼매. 헬리콥터가 가믄(가면) 시방 하우스 지어 놓은 곳에 가만히 떠가고. 가만히 안즈기만(앉으면) 하면 먼지 조깐(조금) 나고, 헬기 뜨는 데서.” 퇴각한 계엄군은 22일 새벽부터 광주시내로 진입하는 모든 외곽 길목을 봉쇄했다. 그렇지만 주남마을은 근처 용산마을과 함께 화순으로 가려면 반드시 지나야 할 길목이어서, 도심을 빠져나와 고향집으로 가려는 피란민들이 ‘6·25’ 때처럼 몰려들었다. 시민군들도 무기와 실탄 보급을 위해 자주 오갔다. 길목 곳곳에 매복한 계엄군은 도로를 향해 무차별 총격을 가해 수십명이 희생됐다. 그러다 23일 끔찍한 집단학살 사건이 터졌다. 계엄군이 너릿재를 지나던 미니버스에 기관총과 M16으로 총격을 가해 타고 있던 18명 가운데 여고생 1명만 빼고 모두 죽고 말았다. 애초 부상만 당했던 2명은 계엄군에 의해 주남마을 뒷산에 암매장됐다가 발굴됐다. 당시 마을 어귀에는 어디나 그렇듯 키 큰 당산나무가 서 있었다. 김막님은 당산나무 뒤에 숨어 있다가 계엄군을 피해 마을을 지나는 사람들의 옷을 잡아당겨 “산으로 가요, 신작로로 가면 죽소”라고 말해주곤 했다. 멋모르고 마을 앞 버스길로 지나가던 시민 3명이 군인들 총에 맞아 죽은 뒤였다. 그 덕분에 무사히 피난간 사람들이 적지 않아서, 그는 지금도 그 나무를 생명나무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그때 계엄군이 시민들의 주검을 묻었던 뒷산 밑 고랑은 지금도 무서워 가기가 꺼려진다. 5월 그날 이후 마을은 침묵에 싸였다. ‘우리가 복이 없어서 당한 일이니까 마을에서 일어난 일을 딱 덮고 입을 다물자’고들 했다. 지금도 누군가 그때 일을 꺼낼라치면 ‘쓸데없는 소리’라며 입을 막곤 한다. 민주화 이후 조사 때에도 마을 사람들은 아무 피해도 없었다고 해버렸다. “이제는 다 말해도 될틴디… 그 징한 꼴을 겪으며 숨도 못 쉬고 고생했는데….” 어르신들도 하나둘 돌아가시고, 기억이 점점 흐릿해지는 요즘 그는 젊은이들에게 그날의 진실을 가르쳐주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정리 광주전남여성단체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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