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27일 새벽 도청에서 계엄군에게 마지막까지 항전하다 숨진 시민들의 주검이 담긴 목관이 이튿날 연막소독을 하는 가운데 광주시 청소차에 쌓여 망월동 묘역으로 실려가고 있다. 제대로 염도 되지 않은 채 묻인 이 주검들은 대부분 신원불명의 무명열사였다. <오월, 민주주의의 승리> 중에서 김녕만
신부 전화받고 병원으로
“걍 짠한 게로 달려갔제”
한때 매일 망월동서 기도
“걍 짠한 게로 달려갔제”
한때 매일 망월동서 기도
[5·18 30돌-5월을 지켜온 여성들]
⑨ 방귀례 방귀례(93), 그의 고향은 전북 남원이다. 아들 열에 이어 열한째로 태어난 딸이었던 덕분에 그는 어렸을 적부터 귀한 자식으로 호강하며 자랐다. 그러나 결혼생활은 그만큼 순탄하지 못했다. 자식 셋을 힘들게 키우면서 마흔 넘어 생긴 병이 낫지를 않자 신앙에 의지해 이겨내고 있었다. 그렇게 성당을 다니면서 그는 자연스럽게 입관 봉사를 하게 되었다. 흔히 ‘염한다’고 하는 입관 봉사는 자식들이 없거나 혼자 사는 사람들이 많이 했다. 그런데 어느날 성당 신도의 상가에서 입관을 도와주다 제대로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양동시장에서 자루를 사다가 입관 연습도 해보고 동네에서 상이 나면 염하는 사람을 따라다니면서 배우기도 했다. 그는 입관할 때 다들 꼭 하는 입마개도 하지 않았고, 끝나면 그 손으로 막걸리도 곧잘 받아먹었다. 그러자 ‘염을 잘한다’는 소문이 나 신도들이 제일 먼저 찾는 사람이 됐다. 1980년 5월18일, 전남대 부근 용봉동에서 살던 그는 교문 앞에서 시위하는 학생들을 봤다. 총을 든 계엄군에게 학생과 시민들이 돌멩이를 던지며 대항하고 있었다. 그런데 전남대 농과대 뒤쪽에서 시위하던 학생들이 죽었다면서 학동에 있는 전남대병원으로 빨리 와달라는 성당 신부님의 전화가 왔다. 거리 곳곳에서 군인들이 통제를 하며 오도 가도 못하게 했다. 금남로에는 유리 조각이며 돌 조각이 쫙 깔려서 제대로 걸을 수도 없었다. 그래도 ‘입원한 아들을 보러 가야 한다’고 거짓말까지 하면서 샛길로 샛길로 살림집의 담을 넘어가면서 겨우 병원으로 들어갔다. 병원에는 학생들의 주검이 샛가마니에 아무렇게나 싸여 구석에 놓여 있었다. 그때 날씨도 무더워 주검 옆에는 쥐가 바글바글하고 창자가 배 밖으로 나온 사람, 눈알이 빠진 사람, 어깨가 떨어진 사람까지 그야말로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가젯베로 옷을 입혀 입관을 하면서도 기가 막혔다. 울면서 울면서 눈물을 닦으며 하나하나 염을 해서 내놓으면 누군지 모르는 이들이 관을 병원 마당에 가지런히 가져다 놓았다. 그해 5월의 전남대병원은 비통함과 애통함으로 가득한 시체안치소였다. 18일 낮까지만 해도 지역에서 가장 큰 종합병원인 까닭에 광주는 물론 가까운 화순, 나주 등에서까지 환자들이 몰려 외래며 입원실이며 만원이었다. 그러다 시내 쪽에서 총소리가 들리더니 군인들이 들어와 다 잡아가고 난리가 났다는 소리에 환자들이 다투어 병원을 빠져나갔다. 그런데 오후가 되자 병원은 더 바빠졌다. 진압봉과 총검으로 무장한 계엄군들이 시위 군중을 무차별 진압하면서 사상자들이 몰려와 응급실은 돌연 야전병원을 방불케 했다.
“(주검들이) 누구 땜에 뭔 일 땜시 죽은지도 모르고 시위한 것만 알지, 걍(그냥) 하도 짠한게로(그 일을 했지). 독자가리(돌자갈)하고 요만한 막대기 하나 들고 싸운디 저 사람들은 총을 갖고 싸워, 저놈들 다 죽것다 싶더라구.” 5월27일 새벽 상황이 끝난 뒤, 도청과 상무관에 임시 안치됐던 항쟁 희생자들의 주검은 광주시 청소차에 짐짝처럼 실려 북구 망월동 광주시립묘지 제3구역에 묻혔다. 그중에는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무명용사’들도 상당수였다. 2001년 12월 정부가 집계해 인정한 ‘5·18’ 공식 사망자는 민간인 168명, 군인 23명, 경찰 4명 등 모두 195명이다. 하지만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 보상신고 때 신청한 행방불명자는 406명이었으나 정부는 70명만 인정했다. 암매장되거나 비밀화장터에서 태워져버린 주검들은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상태다. 5월 그날 이후 그는 한동안 망월동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때 죽어간 사람들, 특히 젊은 학생들의 넋을 위해 거의 매일 기도하러 다녔다. 어떤 날은 괜히 혼자서 망월동 입구 신작로에 앉아 만세를 부르기도 했다. ‘미친 사람처럼’. 염 일을 한 지 15년쯤 되던 어느날. 동네 할머니의 입관을 부탁하는 신부님의 전화를 받고 채비를 하고 나서려는데 큰아들이 따라나섰다. “엄마 혼자 가지 말고 나랑 둘이 가세. 엄마가 한 일 내가 할라네. 엄마는 인자 늙어서 못한게.” 그는 10년 전 팔순이 넘어서까지 염 일을 했다. 여한도 없다. ‘어머니가 지금까지 한 일이야말로 고귀한 넋을 위로해야 한다는 소명의식을 실천한 것’이라며 자청해서 대물림한 아들이 있으니 말이다. 정리 광주전남여성단체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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