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27일 도청 진압 뒤 계엄사는 상무대 영창에 2200여명의 시민을 잡아넣고 이 가운데 375명은 혹독한 고문 끝에 구속했다. ‘광주의 아우슈비츠’로 불리던 상무대는 99년 상무기념공원으로 옮겨 복원해 당시 모습은 사진으로만 남아 있다.
‘구속자가족협’ 참여해 활동
국내외에 간절한 석방 호소
동생은 ‘옥살이 후유증’ 사망
국내외에 간절한 석방 호소
동생은 ‘옥살이 후유증’ 사망
[5·18 30돌-5월을 지켜온 여성들]
⑩ 노영숙 노영숙(56), 그는 1970년대 지역 재야운동의 산실이었던 광주와이더블유시에이(YWCA)에서 청년부 활동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사회운동에 합류했다. ‘간디연구모임’ 회원들과 함께 함석헌 선생을 초청해 간디의 무저항 비폭력 방식으로 독재와 싸우는 길을 토론하기도 했다. 80년 5월 당시 그는 초중생 과외지도를 하며 남동생·여동생과 함께 자취생활을 하고 있었다. 2살 아래 남동생 준현은 무진교회 청년활동과 독서모임 등을 통해 사회문제에 관심을 키우다 78년 6월 이른바 ‘전남대 교육지표 사건’ 때 구속됐다. ‘우리의 교육지표’를 작성해 연대서명한 송기숙 등 전남대 교수 11명이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구속되거나 해직당한 데 항의해 일어난 대규모 시위의 주동자로 몰려 옥살이를 하던 그는 이듬해 10·26 이후 풀려나 80년 봄 복학했다. ‘5·18’ 직전의 전남대는 민주화 열기로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5월15일 교내에서 민족민주화대성회를 연 학생들은 16일에는 도청 광장까지 횃불대행진을 벌이고 시민들과 더불어 밤새 민주화 토론을 벌였다. 그날 교문에서 광주역과 금남로를 거쳐 도청에 이르는 행렬의 선두는 전남대 교수단이 이끌고, 경찰은 호위를 해줄 만큼 광주는 평화로웠다. 그런데 15일부터 집에 들어오지 않던 준현이 17일 밤 계엄군이 대학마다 진주하고 재야 민주인사들을 일제검거한 뒤, 광주시내를 점거한 18일이 되도록 소식이 없었다. 불길한 예감이 든 그는 평소 동생이 자주 다니던 녹두서점으로 향했다. 거리에 나서자 계엄군들이 젊은 청년들을 쫓아다니며 닥치는 대로 잡아 때리고 끌어가고 있었다. 공포스러웠지만 그는 시민들과 함께 계엄군에게 항의했다. 그러자 계엄군은 시민들을 향해 총검을 겨누고 달려들었다. 20일에는 시위 대열에 합류했다가 부상도 입었지만, 동생의 안부와 상황이 걱정스러워 그는 날마다 도청 광장으로 나갔다. 5월27일, 결국 도청이 함락되고 계엄군은 28일부터 도청 안의 주검들을 청소차에 실어 망월동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혹시 동생도 실려갔을까 하는 마음에 여동생과 함께 망월동으로 쫓아갔지만 주검들은 가족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다 묻혀버려 확인조차 할 수가 없었다. 며칠 뒤에야 준현이 상무대 영창에 갇혀 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달려갔다. 면회도 안 되는 상황에서 초조한 며칠이 지났을까, ‘장지권’이란 군인이 당시 합수부 수사국 요원들이 퇴근한 뒤 저녁에 면회를 시켜주었다. 그때 상당히 많은 가족들이 그 군인의 도움을 받았다. 노영숙은 그곳에서 알게 된 안성례(명노근 당시 전남대 해직교수 부인), 이명자(정동년 당시 전남대 복학생 대표 부인), 김정부(구속자 김종배의 형) 등과 ‘5·18구속자가족협의회’ 결성에 참여했다. 개신교와 천주교의 도움을 받아 국내는 물론 전세계에 ‘5월 광주’의 진실을 알리고 구속자 석방 탄원서를 보내는 활동을 벌였다. 그는 81년 군사법정에서 ‘내란수괴죄’로 사형선고를 받은 정동년과 2명의 구명운동을 하고자 김수환 추기경을 면담했던 때를 지금도 기억한다. 아기까지 업은 촌 아낙네들이 추기경 집무실로 몰려들자 명동성당 쪽에서는 당황한 기색이었으나 정작 추기경은 ‘아, 정말 고생했다, 잘 왔다’며 한 명 한 명을 다독여 위로해주었다. 이때의 점거시위는 ‘5·18로 인한 사형수는 없다’는 정부의 발표(약속)를 이끌어내는 성과를 거뒀다. 구속자가족협의회가 광주전남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로 재결성된 86년 이후 그는 “상처받고 지친 광주시민들을 음악과 예술로 달래주고 싶은 마음”에 뜻맞는 이와 클래식 전문 ‘베토벤 음악감상실’을 운영했다. 그의 바람대로 감상실은 결사항쟁지 전남도청이 보이는 곳에서 오랫동안 광주시민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러나 81년 풀려난 뒤 내내 인쇄일을 하며 노동운동을 하던 준현은 두 번의 옥살이 후유증으로 2000년 먼저 세상을 떴다. 이후 어머니도 여읜 그는 상심한 나머지 2007년 이후 한동안 칩거하기도 했다. 그는 지금 5월어머니집(관장 안성례) 사무총장으로서 ‘5·18’을 비롯해 민주화운동 유가족 여성들의 상처받은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일을 돕고 있다. 그의 남은 바람은 언제부턴가 떠들썩한 잔치로 변해가는 ‘5·18 기념’ 행사가 항쟁의 현장에서 시민들이 함께 모여 주먹밥을 나누며 그날의 상처를 공유하고 숭고한 정신을 이어가는 진정한 축제가 되는 것이다. 정리 광주전남여성단체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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