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21일 계엄군이 물러난 이후 전남도청 항쟁지도부에서는 행방불명자의 명단을 접수해 각 병원의 사상자 명단과 대조해 게시했다. 23일 도청 앞에서 가족을 찾아 나선 여성들이 명단을 확인하고 있다. <광주는 말한다> 신복진 사진집에서
“유골이나마 내가 묻어야제”
어머니는 10년 동안 수소문
‘행불’로 인정됐지만 눈물만
어머니는 10년 동안 수소문
‘행불’로 인정됐지만 눈물만
[5·18 30돌-5월을 지켜온 여성들] ⑭ 김연임 김연임(당시 26). 그는 1980년 5월21일 광주의 소용돌이 속에 사라졌다. 부처님 오신날이었던 그날 광주를 오가는 모든 길목은 계엄군에 의해 봉쇄됐다. 시외전화마저 끊겼고, 언론은 통제됐다. 18일부터 나흘째 계속된 계엄군의 무자비한 폭행과 학살에 분노한 시민들은 도청으로 모여들었다. 김재순, 그때 시내 중심가 금남로에서 멀지 않은 대인동에서 한복집을 하던 그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잠깐만 도청 상황을 보고 오겠다며 나간 직원 김연임이 감감무소식이었다. 바느질을 배우겠다고 해서 데리고 있는 터였다. 시간이 갈수록 도청 쪽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거세졌다. 오전에는 시민들이 광주역 광장에서 계엄군의 총에 맞은 주검 2구를 손수레에 싣고 왔다는 말도 들려왔다. 전에 보지 못한 대형 군용헬기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도청 쪽으로 몰려가는 것도 그렇거니와 대인동 일대 계엄군이 도청을 에워쌀 정도로 급격히 불어난 것도 마음에 걸렸다. 그런데 막상 연임을 생각하자 영암이 고향이라는 것밖에 아는 게 없었다. 알 수 없는 불안감에 가게 밖을 몇 번이나 내다본 김재순. 그때 갑자기 도청 쪽에서 애국가가 들려왔다. 그러고는 마치 ‘전쟁이 터진 듯’ 엄청난 총격소리가 뒤를 이었다. 그날 연임은 가게로 돌아오지 않았다. 아니,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오쌍금, 영암에 살고 있던 연임의 어머니는 가끔씩 다녀가던 딸이 5월 초 들른 뒤 몇 달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어 내내 속만 태우고 있었다. 광주에 있다는 것뿐, 어디서 무슨 일을 하는지만 알아도 연락을 해볼 텐데, 어머니는 답답한 마음을 참고 딸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해 추석 명절이 되도록 딸에게서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광주에서 ‘난리’가 났을 때, 영암에도 시민군들이 차를 타고 들어왔더랬다. 계엄군의 만행을 전해들었고, 특히 부녀자들에게 저질러진 몹쓸 짓을 듣고서는 치를 떨기도 했다. 불길한 예감에 결국 그는 딸을 찾아 나섰다. 그러면서도 연임이가 ‘5·18’ 때 사라졌다고는 믿고 싶지 않았다. 이후 10년 동안 어머니는 딸의 행방을 찾아 안 가본 곳이 없었다. 서울의 신문사와 방송사, 정부중앙청사와 국회의사당을 찾아가 딸을 찾아달라고, 유골이나마 내 손으로 묻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호소한 것도 몇번인지 모른다. 하지만 연임의 행방불명이 5·18과 관계가 있는지를 밝혀내기란 쉽지가 않았다. 개연성은 있었지만 뚜렷한 증거가 없었다. 광주 피해 보상법이 생기자 보상금을 노린다는 주위의 곱지 않은 시선도 있었다. 도저히 흔적을 찾을 수 없자 어쩌면 딸이 어딘가에 살아 있다가 불쑥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쥐도 새도 모르게 죽임을 당해 암매장된 사람이 많다는 증언도 많았고, 실제로 주검들이 발굴되기도 했다. 연임도 그리된 것이라면 유골이라도 거둬 넋을 위로해줘야 했다. 원점으로 돌아와, 광주에서 딸의 행방을 알 만한 이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다 대인동을 헤집게 되었고, 김재순을 만났다. 김재순은 연임의 어머니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세상에 참 많이도 닮었다. 내가 전에 데리고 있던 애랑 너무 많이 닮았소야.” 어머니는 조심스럽게 ‘그애의 이름’을 물었고, ‘연임’이라는 대답을 들었다. 비로소 딸의 행방불명 사실을 증언해 줄 사람을 만난 것이다. 딸을 찾아 나선 지 10년 만이었다.
김재순은 오쌍금의 요청에 흔쾌히 응했다. 비록 시대가 바뀌었다고는 하나, 증언을 하자면 이것저것 귀찮은 일이 많을 터였다. 하지만 딸을 찾으려는 어미의 마음이었다. “내가 뭣을 바라겄소. 연임이를 찾아주고 싶은 마음뿐인게 딴 것은 걱정하지 마시오. 사라진 사람을 찾아야제라. 얼마나 속이 상했을까이.” 김재순의 증언으로 상당 부분 개연성이 있다고 판단됨에 따라 김연임은 5·18 행방불명자로 인정받았다. 그로부터 또 10년이 지난 2000년 무렵 법에 따라 그의 가족에게는 보상금이 지급되었다. 딸의 행방을 찾으려는 어머니의 긴 여정은 그렇게 끝이 났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버리지 않았던 희망, 딸이 살아 돌아오기만을 바랐던 희망이, 그만 허망해져버린 것 같아 어머니의 눈물은 오늘도 마를 날이 없다. 지난 90년부터 2000년까지 4차에 걸쳐 진행된 ‘5·18 관련’ 피해 조사에서 모두 465명의 행방불명자가 신고됐다. 그러나 김연임처럼 인정을 받은 사례는 70명뿐이다. 정리 광주전남여성단체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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