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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길을찾아서] 열살소년이 봐버린 미군 이리역 폭격과 집단학살 / 문정현

등록 2010-06-03 20:57수정 2010-06-04 19:38

1950년 7월11일과 15일 미군 전투기가 두 차례에 걸쳐 이리역(익산역)과 주변 송학동 일대를 집중폭격하는 바람에 숨진 400여명을 비롯해 양민학살 피해자의 유족들은 반세기 만인 2000년에야 해원제를 열고 진상규명을 요구할 수 있었다. 사진은 2003년 역 광장에서 열린 네번째 추모제 장면.
1950년 7월11일과 15일 미군 전투기가 두 차례에 걸쳐 이리역(익산역)과 주변 송학동 일대를 집중폭격하는 바람에 숨진 400여명을 비롯해 양민학살 피해자의 유족들은 반세기 만인 2000년에야 해원제를 열고 진상규명을 요구할 수 있었다. 사진은 2003년 역 광장에서 열린 네번째 추모제 장면.
문정현-길 위의 신부 4
10살 때 한국전쟁이 터졌다. 1950년 6월27일인가부터 새벽에 총소리, 박격포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6월 말께 남하한 인민군과 남쪽 경찰군의 전투가 벌어졌다. 대포 소리가 요란하고 실탄 나는 소리가 쌩쌩 정적을 가로질렀다. 무서운 나머지 고구마를 저장해 두던 굴속에 들어가 피신했다. 곧 인민군 세상이 되었다. 그때 아버님이 폐농양으로 와병중이어서 피난이 어려운 형편이어서 어머니는 나와 바로 밑 동생 현옥을 이웃 아저씨네 고향인 익산군 함라면 칠목리의 한 산골마을로 보냈다. 그러나 어린 현옥이 집을 떠나오자 너무 울며 보채는 바람에 사흘 만에 되돌아왔다. 훗날 알고 보니 안전할 것으로 믿고 갔던 그 동네가 좌익의 소굴이었다.

전쟁이 터진 지 20일쯤 지난 7월12일, 모처럼 날이 개고 꽤 무더운 날이었다. 오후 늦게 동네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 전날 당시 이리역 기관고를 미군이 폭격을 해서 사람들이 엄청나게 죽었다는 소문이었다. 당시 이리는 교통의 도시였고, 군산·정읍·삼례·논산 밑으로 충청도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 마을 황등에서도 이리로 통학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때마침 그날은 한국군 징병 집결일인데다 소 장날이라 이리역에 사람이 많이 몰려 있었다. 역 근처 이리극장에서는 남성중과 이리여중 학생들이 한 국회의원의 연설을 듣고 있었다. 우리 마을에서도 이리에 나간 사람이 많았다. 폭격 소식을 듣고 동네 사람들이 울며불며 이리 시내로 달려갔다. 돌아온 마을 사람들은 이리역 부근이 온통 아수라장이 되고 사람들이 창자가 끊어져 죽고 처참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고들 전했다. 그 당시에는 미군 전투기가 이리를 수원으로 착각해 오폭을 했을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지만 전쟁중이라 희생자 가족들은 진상규명 요구는커녕 하소연조차 할 수 없었다.

미군기의 이리역 폭격 사건이 역사 속에 묻혔다가 다시 떠오른 것은 99년 철도청에 대한 국정감사 때였다. 그동안 억울함을 참고 숨죽여 지내던 유족들과 시민단체가 모여 ‘익산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대책위와 유족회’를 꾸리고 정부에 진상조사를 요청한 것이다. 유족들은 2000년 7월5일 반세기 만에 처음으로 이름이 바뀐 익산역 광장에서 ‘미군의 양민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해원제’를 열고 위령비를 만들어 세웠다. 그러나 아직도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지금까지 드러난 자료를 보면, 이리역 폭격 사건은 당시 미 제5공군이 인민군의 한강 이남 남진을 막고자 대대적인 ‘후방 차단 작전’을 펼치다 일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내가 다니던 황등초등학교는 인민군이 내려왔을 때 의용군 훈련소가 되더니 그들이 떠나자 다시 미군이 들어와 차지했다. 미군들이 춥다고 책상과 걸상을 부숴서 난로를 땔 때면 교장 선생님은 속상해하면서도 말도 못하고 끙끙 앓으셨다. 미군들은 동네 아이들을 뽑아서 설거지를 시켰다. 우리는 난로에 주전자 물을 데워서 설거지를 해주고 시레이션(C-Ration)이라는 미군 전투식량과 다른 먹을 것들을 받곤 했다.

그런 어느날 학교 앞에서 미군 두 명이 나를 불렀다. 흑인과 백인 병사였는데 나를 언덕배기에 세우고는 머리 위에 국방색 깡통을 올려놓았다. 나는 군것질거리라도 생길까 싶어 시키는대로 했다. 그런데 그들이 5~6m 떨어진 거리에서 카빈총을 꺼내더니 내 머리 위에 올려놓은 깡통을 겨냥해서 쏘는 것이 아닌가. 혼비백산한 나를 보고 흑인 병사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 미군 녀석의 하얀 이는 훗날 두고두고 떠올라 화가 났다. 하지만 그때 그 순간 반쯤 얼이 빠진 채로 먹을 것을 받아서 집으로 돌아온 나는 기회가 되면 또 갈 생각이었다. 식구들이 시레이션 음식을 무척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때만 해도 내게 미군은 우리나라를 공산주의로부터 해방시켜 준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문정현 신부
문정현 신부
그런데 지금도 가끔 악몽으로 되살아나는 전쟁의 기억은 따로 있다. 그 무렵 대낮에 혼자 우연히 목격한 집단사살 장면이다. ‘황등돌’(화강암)로 유명한 마을 황등산에 놀러 갔다가 남쪽 자락의 공동묘지 어귀를 내려오는데, 민간인 차림의 사람들을 비석 앞에 줄줄이 세워놓고 총을 겨눴다. 땅땅 소리가 나자 사람들이 팍팍 꼬꾸라졌다. 너무 무서워 도망치듯 달려 내려왔다. 훗날 좌익에 가담한 사람들이 끌려가 1명만 살아남았다는 얘기가 돌긴 했지만 어린 나로서는 누가 누구를 왜 죽였는지, 공산주의나 자유민주주의가 뭔지 모르던 시절이었다. 다만 사람이 똑같은 사람을 죽이는 그 섬뜩함에 놀랐을 뿐이다.

구술정리/김중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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