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7월부터 민청학련과 인혁당 사건을 계기로 시작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주도의 목요기도회에 참가한 필자는 구속자 석방운동을 시작으로 반유신 반독재 투쟁에 투신했다. 그 무렵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열린 기도회의 연단 앞줄로 문익환·문동환 목사 형제와 함세웅 신부 모습이 보인다. 사진 KNCC 제공
문정현-길 위의 신부 12
1974년 10월9일 서울 혜화동 가톨릭대학(대신학교)에서 열린 전국성년대회에서 전주교구장 김재덕 주교의 강론에 사제와 신자들은 박수를 치고 환호했다. 김 주교의 강론은 박정희 정권과 맞서는 젊은 신부들에게 큰 용기가 되었다. 미사가 끝나고 전주교구 사제들을 선두로 거리시위가 시작되었다. 나는 확성기를 들었고, 다른 사제들은 내가 준비해 간 펼침막과 태극기를 앞세우고 최루탄 가스를 맡아가며 가톨릭대학에서 혜화동 사거리까지 진출했다. 전례없이 큰 집회였다. “지학순 주교 석방하라” “유신헌법 철폐하라”는 시위대의 외침이 멀리 청와대가 있는 삼청동까지 들렸다고 한다. 그런 사태에 대부분의 주교들은 몹시 불편해했다. 교황대사를 비롯한 주교들은 시위대로 학교 정문이 막히자 쪽문으로 나와 피해갔다.
그날 전주에서 전세버스를 대절해 상경했던 우리는 이 거리시위 때문에 내려가는 톨게이트 입구에서 경찰에 연행되지 않을까 걱정을 했다. 다행히 서울을 벗어난 일행은 망향휴게소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김 주교와 만났다. 김 주교와 나는 서로 뜨겁게 포옹을 했다. 그것으로 둘 사이의 불편했던 앙금은 다 풀어졌다. 김 주교는 그 뒤로도 음으로 양으로 정의구현사제단 활동을 지지해주며 큰 힘이 되었다.
74년 7월 지학순 주교가 연행되면서 민청학련 사건에 대해 알게 되었지만 나는 그때까지도 인혁당(인민혁명당재건위) 사건에 대해서는 별다른 인식이 없었다. 어느날 친구인 서울교구 사목국장 신부를 만나러 명동의 서울대교구청을 갔다가 인혁당 가족들을 처음 만났다. 당시 김수환 추기경님의 집무실로 향하는 복도에 들어서자 초췌한 모습으로 바닥에 앉아 있던 부인들이 내 신부복의 로만칼라를 보고는 대뜸 서명용지를 내밀었다. 김수환 추기경, 함석헌 선생, 윤보선 전 대통령, 윤형중 신부의 서명이 있었다. 두말없이 ‘문정현’이라고 서명을 했다. 그분들은 인혁당 주범으로 몰린 우홍선·이수병·김용원씨의 부인이었다. 그해 4월8일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의 배후로 지목돼 구속된 인혁당 관련자 23명 가운데 8명은 사형, 나머지는 무기에서 15년까지 중형을 받은 상태였다. 이들은 빨갱이로 몰려 그 가족들까지도 친척과 이웃들에게 기피인물이 되어 있었다.
피고인들의 기본 인권은커녕 가족 면회조차 허용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한 나는 가족들까지 정보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는 얘기를 듣고 더욱 도와야겠다는 책임감을 느꼈다. 인혁당 가족들과의 인연으로 종로5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회관에서 목사들이 진행하는 목요기도회를 알게 된 나는 목요일 새벽마다 버스를 타고 올라와 참석했다. 그해 7월부터 시작된 기도회에는 여러 성직자들과 인혁당, 민청학련 학생 가족들이 함께했다. 기도회를 통해 여러 가지 소식을 들을 수 있었고 많은 영향을 받았다. 서울교구 함세웅 신부와 원주교구 신부들, 전주교구의 지정환 신부도 가끔 참석했다. 문익환 목사를 비롯해 문동환·박형규·김상근·임명진·권오경·이우정 등 기독교 성직자와 신자들도 알게 됐다.
이해동 목사를 비롯한 젊은 목사들의 자생모임으로, 독재에 항거하다 구속된 수많은 젊은이와 동료들을 위한 순수 기도모임이던 목요기도회는 회를 거듭할수록 활기를 띠었다. 또 민주화운동실천가족연합회(이후 민가협)의 모체인 구속자가족협의회가 결성되는 성과를 낳았다. 그러다 정보부의 감시가 더 강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목요기도회에서 “동네에 나쁜 놈이 있으면 동네 사람들이 혼내주어야 한다.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오입하고 백성을 강압하면 백성이 들고일어나 끌어내야 한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당시로는 매우 강경하고 위험한 발언이었다.
그런데 민청학련 가족들조차 인혁당 가족들을 꺼렸다. 아마 자신들도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힐까 두려웠을 것이다. 나는 사제단의 시국미사나 기도회를 빠지지 않고 다니며, 만나는 사람들에게 인혁당 사건이 조작된 것이라는 사실을 전하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러자 정보부에서 나에 대한 미행·도청·가택수색 등 감시를 하기 시작했다. 정부의 억압이 커질수록 두려움보다 오히려 그것을 뚫으려는 힘이 용솟음쳤다. 그저 의욕 넘치는 젊은 사제였던 나는 박정희 정권의 부당함을 알아갈수록 더는 그 부당함을 용납할 수 없게 되었다. 다른 사제들도 인혁당 가족들을 최선을 다해 도왔다. 특히 함세웅·최기식·신현봉 신부 같은 분들은 인혁당 가족들을 한 가족처럼 따뜻하게 배려했다.
구술정리/김중미 작가
문정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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