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학 사장이 21일 신창스포츠 매장에서 다 만든 축구화를 손에 든 채 웃고 있다. 김씨 뒤로 그가 만든 축구화와 수선을 기다리는 일반 축구화가 보인다.(위)
13살때 신발공장 ‘입문’…북한까지 입소문 번져
이번 월드컵 골 가뭄인데 축구화 탓은 아닐까요
이번 월드컵 골 가뭄인데 축구화 탓은 아닐까요
국내 유일 ‘수제 장인’ 김봉학씨
지난 21일 서울 중구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근처 신창스포츠 매장에서 만난 김봉학(49) 사장은 손님의 발을 노트에 올려놓고는 본을 뜨고 있었다. “손님이 원하는 대로 만들어드립니다. 하지만 축구화 앞 부분은 발에 딱 맞아야 해요.” 손님 박아무개씨는 “아는 형님이 이곳 축구화를 고집하는데, 편하고 좋아보여서 왔다”며 웃었다. 2평 남짓한 공간에는 축구화 밑창, 손때 묻은 신골(신을 만드는 데 쓰는 모형), 수선을 기다리는 축구화가 가득했다.
김 사장은 ‘맞춤식 수제 축구화’를 만드는 장인이다. 현재 국내에선 유일하다. 1980년대 브랜드 축구화가 쏟아져 들어오면서 축구화를 만드는 이들이 하나 둘 떠났지만, 김 사장은 여전히 손으로 만드는 축구화를 고집하고 있다. 주문량과 무관하게 8만5000원짜리 축구화 한 켤레를 만드는 데는 일주일이 필요하다.
“주변에서는 ‘공연히 고집 피우지 말라’며 말리는 사람이 많지만, 저는 아직도 축구화로 승부를 보고 싶어요.”
김 사장과 축구화의 인연은 197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3살에 대구 누나집에 얹혀살며 육상화나 축구화 바닥에 들어가는 ‘철침’을 만드는 대장간에 취직했다. 어려운 형편 탓에 초등학교를 마치지 못한 채 12살부터 ‘아이스케키’를 배달했던 그에게는 ‘안정적인 일자리’였다.
그렇게 축구화의 ‘기본’에 입문한 김 사장은 15살 나던 해에 신발 기술자의 견습공으로 들어갔다. 욕먹고 맞아가며 어깨너머로 배운 기술로 18살에 기술자가 됐다. “집안에 누구 한 사람이라도 잘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밤을 새워가며 악착같이 일에 매달렸다. 하루 50켤레까지 만들며 당시 돈으로 주급 10만원을 받던 호시절이었다.
하지만 김 사장은 80년대 브랜드 축구화의 홍수에 휩쓸려 일자리를 잃었다. “일이 없어지면서 죽겠다고 무턱대고 밥을 굶기도 했다”는 그는 1987년 빈손으로 상경했다.
남의 공장 한켠에서 다시 축구화를 만들었다. 외상으로 가죽을 떼와 일일이 가위질하고 꿰매어 만든 신발을 어깨에 지고, 조기축구회와 동네 시장에 팔러다녔다. “‘싸구려 축구화를 누가 사느냐’는 냉대를 엄청나게 받았죠.” 다행히 꼼꼼한 그의 솜씨가 알려지며 입소문을 타고 축구화가 조금씩 팔리기 시작했다. 2000년 지금의 자리에 가게를 열었고, 2003년부터는 오랜 꿈이던 맞춤식 축구화를 본격적으로 만들었다. “옛날엔 발을 축구화에 맞춰야 했잖아요. 저도 축구하면서 발톱이 몇 번이나 빠졌거든요.” 그의 축구화는 마침내 북녘에도 알려졌다. 남북체육교류협회의 권유로 2008년 평양을 방문해 북한 4·25축구단 여자 선수들 25명의 축구화 제작을 요청받았다. “수제 축구화의 본고장인 평양에서 기술을 알아줘 기분이 좋았죠.” 그러나 남북교류가 흐지부지되면서 그때 주문받은 50켤레는 북쪽에 끝내 전달하지 못했다. 가게 한구석에 쌓아두고는 있지만, 그래도 이 축구화들은 김 사장의 ‘자부심’이다. 월드컵이 한창이지만 김 사장은 이날도 밀린 주문을 소화하느라 짬짬이 경기를 봤다. “이번 대회는 프리킥 골이 잘 안 나오네요. 축구화의 영향이 아닐까요?” 그의 머릿속은 온통 축구화 생각으로 꽉 차 있는 듯했다. 글·사진 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
김봉학 사장이 지난 2008년 만든 북한 4·25팀 축구화.
남의 공장 한켠에서 다시 축구화를 만들었다. 외상으로 가죽을 떼와 일일이 가위질하고 꿰매어 만든 신발을 어깨에 지고, 조기축구회와 동네 시장에 팔러다녔다. “‘싸구려 축구화를 누가 사느냐’는 냉대를 엄청나게 받았죠.” 다행히 꼼꼼한 그의 솜씨가 알려지며 입소문을 타고 축구화가 조금씩 팔리기 시작했다. 2000년 지금의 자리에 가게를 열었고, 2003년부터는 오랜 꿈이던 맞춤식 축구화를 본격적으로 만들었다. “옛날엔 발을 축구화에 맞춰야 했잖아요. 저도 축구하면서 발톱이 몇 번이나 빠졌거든요.” 그의 축구화는 마침내 북녘에도 알려졌다. 남북체육교류협회의 권유로 2008년 평양을 방문해 북한 4·25축구단 여자 선수들 25명의 축구화 제작을 요청받았다. “수제 축구화의 본고장인 평양에서 기술을 알아줘 기분이 좋았죠.” 그러나 남북교류가 흐지부지되면서 그때 주문받은 50켤레는 북쪽에 끝내 전달하지 못했다. 가게 한구석에 쌓아두고는 있지만, 그래도 이 축구화들은 김 사장의 ‘자부심’이다. 월드컵이 한창이지만 김 사장은 이날도 밀린 주문을 소화하느라 짬짬이 경기를 봤다. “이번 대회는 프리킥 골이 잘 안 나오네요. 축구화의 영향이 아닐까요?” 그의 머릿속은 온통 축구화 생각으로 꽉 차 있는 듯했다. 글·사진 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