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6월25일 밤 전주 여산성당 주임신부 박창신 신부가 사제관에서 괴한들의 급습을 받아 중상을 입고 전북대병원에 입원해 있다. 당시 ‘5·18 광주항쟁’의 진상을 누구보다 앞장서 알렸던 그는 이후 오랫동안 고통스런 치료를 받았으나 지금껏 장애를 겪고 있다.
문정현-길 위의 신부 26
1980년 5월 전주교구는 주보 ‘숲정이’를 통해 5·18 광주항쟁을 알리고 특별헌금을 모으고 헌혈운동을 해나갔다. ‘숲정이’는 1972년 대림절에 6개 본당의 통합주보로 창간됐다가 74년 교구보로 발돋움을 했다. ‘숲정이’는 유신과 전두환 독재정권을 거치며 교회 안팎에서 일어나는 역사적 사건의 현장에서 부딪치는 사제들과 신자들의 예언자적 목소리를 담아냈다. 그래서 ‘숲정이’는 항상 보안대의 검열 대상이었다.
그해 5월 말쯤 전주 보안대 쪽에서 광주에 들어갈 수 있도록 조처해 주겠다고 전했다. 자기들 딴에는 광주를 진압하고 대충 정리가 된 시점이라 보여주려고 했던 것 같다. 나는 전주중앙성당 사목회장과 같이 광주로 갔다. 금남로의 거리는 깨끗하게 청소돼 있어 정상을 되찾은 듯했다. 하지만 가톨릭회관으로 가자 유리창은 거의 깨져 있고 교구청 회의실을 비롯한 곳곳에 실탄이 그대로 박혀 있었다. 전남도청 부근 건물들 대부분이 비슷한 상황이었다. 광주교구청에서 만난 한 지인은 거의 넋이 나간 채로 시민들을 ‘폭도’로 몬 것에 대해 분노를 쏟아냈다. 그의 이야기는 처절했던 광주의 상황을 짐작하게 했다.
광주에 다녀온 뒤 나는 기회만 되면 ‘전두환의 광주 살육작전’에 대해 계속 얘기하고 다녔다. 하지만 내가 광주항쟁의 실상을 일부나마 확실하게 실감할 수 있었던 것은 한 다큐멘터리 필름을 통해서였다. 항쟁 당시 외신기자들이 찍은 사진과 영상을 몰래 반출해 독일에서 제작한 이 다큐는 다시 비밀리에 한국으로 들어와 퍼지고 있었다. 다큐 속 사진들은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 지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지만 충격적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한두 명씩에게만 조심스럽게 보여주다가 아예 성당에서 신자들에게 틀어주었다.
광주항쟁이 일어난 지 한 달쯤 뒤 여산성당 박창신 신부가 테러를 당하는 사건이 터졌다. 박 신부가 주임으로 있던 여산성당은 충청남도 접경지역이라서 본당 소속 공소 6개가 행정구역상 충남에 속해 있었다. 그런데 6개 공소 중 마전공소 주일학교 학생이던 여중생 3명이 성당에서 준 유인물을 주민들에게 다시 배포하다 충남 강경경찰서에 연행되고, 신근리 공소 회장은 대전에 있는 충남 계엄사로 끌려가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래서 그즈음 광주항쟁을 알리는 데 적극적이었던 박 신부에게 몸조심하라는 얘기가 많았다.
그런 와중인 6월25일, 박 신부는 금마공소에서 수요미사와 예비자 교리를 하고 돌아와 성당 사제관에서 신자들과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다. 초인종이 울려 현관으로 내려간 그에게 괴한들이 들이닥쳐 칼과 쇠파이프를 휘둘렀다. 박 신부는 늑골 골절, 전신 타박상, 여섯 군데 자상 등으로 전치 4주의 중상을 입었다. 교구 정의평화위원회는 진상을 밝히려고 애를 썼으나 끝내 사법적으로 범인을 밝혀낼 수 없었다. 박 신부는 그 후유증으로 1년 뒤 하반신 마비가 와 두 달 넘게 치료를 받아야 했고 3년 가까이 목발과 지팡이 없이는 걸을 수가 없었다. 그 역시 나처럼 지금껏 불구의 몸이다.
사건 9년이 지난 89년 1월, 리수현 신부와 나는 ‘박창신 신부 테러 사건 및 전동성당·오룡동성당 화재사건 진상규명’ 요구하며 전북도경 민원실에서 단식 농성했다. 전주교구 사제단은 경찰에 재수사를 요청했다. 경찰국장이 재조사를 하겠다고 하고, 박정일 주교님이 만류해 단식을 접었지만 수사는 그대로 종결되고 말았다. 우리는 지금까지도 그 사건을 공수여단의 소행이라고 믿고 있다.
이후 나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광주의 진실을 알리고자 애썼다. 광주항쟁에 관한 강연 요청을 자주 받게 된 나는 가는 곳마다 전두환 군사정권을 비판했다. 81년 사순절 때는 성당에다 이런 펼침막을 내걸었다. 흰 바탕에 검은 글씨로 ‘사람아,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창세기 3장19절)’라고 썼다. 정보기관에서는 하필 사순절에 그런 현수막을 내거니 더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욕을 한 것은 아닌데 그 말이 자기들한테 하는 것 같기도 하고, ‘흙으로 돌아갈 것들이 그렇게 엄청난 짓을 했냐’고 질책하는 것 같았던 모양이다. 보안대에서는 떼라고 종용했다. 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그건 성서 말씀이다. 떼려면 떼어가라.” 그러나 그들은 떼지 못했다
구술정리/김중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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