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설문·번역료에 쓸모없는 광고스크린 임대료 지불
병원 회식비도 고스란히…더 교묘한 방법 개발 ‘올인’
병원 회식비도 고스란히…더 교묘한 방법 개발 ‘올인’
제약사 직원이 털어놓은 ‘리베이트 백태’
입사할 때엔 정말 이 정도인지 몰랐다. ㄷ사 영업사원인 나는 의사들에게 약품의 효능을 설명하지 않는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그들 손에 돈을 쥐여주는 게 나의 일이다. 현금, 상품권, 회식비 지급 등 고전적인 방법으로는 내가 써야 할 돈을 다 쓰지 못한다. 거래를 늘리려면, 좀더 세련되고 고상한 방법이 동원돼야 한다. 회사에서 내 능력과 창의성은 돈을 쥐여주는 합법적이고 안전한 방법의 개발 여부에 따라 평가된다.
돈을 직접 병원에 주는 영업사원은 아마추어다. 병원에서도 꺼린다. 다른 회사를 중간에 거치는 게 비교적 안전하다. 병원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이거나, 의학 논문을 번역하는 일을 리서치 회사에 의뢰한다. 그 회사를 통해 병원에 돈이 건너가는 것이다. 의사가 일일 환자 수나 환자연령 분포 등과 같은 설문에 응해주고 1건당 5만원, 논문을 번역해주고 1건당 20만원을 받는다. 당연히 의사는 직접 설문에 응하거나 번역을 하지 않는다. 설문은 우리 회사 직원이 대신 하고, 논문은 이미 번역본이 나와 있는 걸 고른다. 병원과 의사는 사인만 하고 돈을 받으면 된다.
광고비 지출도 괜찮은 방법이다. 병원 로비에 광고 스크린을 설치하고, 임대료 명목으로 한 달에 500만~1000만원을 건넨다. 이 역시 엘시디(LCD) 모니터나 터치스크린을 제작·설치하는 업체를 통해야 안전하다. 홈페이지 제작사를 통하는 방법도 있다. 병원 홈페이지를 만들어주고 이곳에 광고를 올린 뒤 광고비용을 지불해 ‘합법적’ 비용을 지출한다. 물론 광고는 필요하지 않다. 약은 병원에서 구매하면 되는 것이지, 의사가 처방해주는 약을 먹는 소비자가 약에 대해 알아 무엇하나.
주유소 영수증이나 음식점 영수증 등을 모으는 일은 우리 업무의 기본이다. 이를 회사 지출로 처리해야 현금이나 상품권을 확보해 뿌릴 수 있다. 한 병원과 거래를 트면, 그 병원 사람들이 자주 회식하는 식당과도 거래를 트는 셈이다. 회식비는 제약사 몫이다.
어쩌다 ‘고약한’ 의사를 만나면 잦은 호출을 각오해야 한다. 그가 다른 병원 의사들과 모여 술을 마시는 자리에 가면서 우리에게 연락을 한다. 그 자리에 끼지 못하지만, 역시 계산은 우리 몫이다.
우리 회사에만 이런 일을 도맡아 하는 영업사원이 200명이 넘는다. 한 사람이 평균 20여개의 거래 병원을 맡는다. 우리 회사도 다른 회사처럼 조만간 공정위의 단속을 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몇 십년 계속돼온 리베이트 관행이 사라질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봐도 대부분의 거래가 ‘합법적인’ 방법을 가장하고 있다. 관련 자료는 지점장 이상의 간부들이 회사 컴퓨터가 아닌 개인 메모리에 따로 관리한다. 따로 관리되는 문서들도 실사가 나오기 전에 미리 연락이 와 어딘가로 옮겨진다. 이걸 찾아낼 수 있을까?
내가 한 일 때문에 환자들이 치러야 하는 약값의 거품이 꺼지지 않는 걸 생각하면 괴롭지만, 어쩔 수 없다. 이게 직업이니. 송채경화 기자 kh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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