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때 남쪽으로 피난을 온 뒤 고향이 바라다보이는 연평도에서 20여년을 살았다는 이기무(90)·공혜순(80) 부부가 북한의 포격 뒤 임시 숙소로 마련된 인천시 중구 신흥동 인스파월드 찜질방에 앉아 있다.
송채경화 기자
삶 준비하는 연평도 사람들
어구 손질하며 바다 나갈 희망 안버려
급식소엔 꽃게 90㎏ 기증 ‘통큰 어민’도
대피소 노인들 “고향 놔두고 어디를 가나” “물도 좋고 날씨도 좋아, 조업을 해야 하는데….” 30일 연평도 포구에서 만난 박철훈(56)씨는 한참 동안이나 바다를 바라봤다. 그러더니 주섬주섬 어구들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이날 오후엔 인천에 나가 있던 박씨의 어선이 연평도로 돌아왔다. 멸치잡이를 하는 박씨는 “이런 상황이 빨리 끝나야 되는데…. 내일 한-미 연합훈련이 끝나면 주민들이 좀 더 들어오고 언젠가는 다시 조업을 할 수 있지 않겠어요?”라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이날 인천에서 출발한 주민과 선원 18명이 연평도에 돌아왔다. 몇몇 어민들이 박씨처럼 어구를 손질하며 조업을 준비했다. 연평도 전체가 통제구역으로 설정돼 조업 재개가 불투명한 상황이지만, 선착장에 서 있던 어민들은 하나같이 당장 바다로 나가고 싶은 표정이었다. 박씨는 해병대에서 상근예비역으로 근무하는 아들 때문에 섬을 나가지 않고 어머니 김상숙(75)씨와 함께 머물고 있다. 그는 전날 “다들 고생이 너무 많다”며 대한적십자사가 연평초등학교에서 운영하는 무료급식소에 꽃게 90㎏을 내놓았다. 덕분에 먹을거리가 부족한 연평도의 자원봉사자와 시설복구 인력, 내외신 취재진 등이 ‘연평도 꽃게탕’을 맛보는 호사를 누리기도 했다. 섬을 떠나 인천의 임시 대피소에 머물고 있는 이들 중에서도 연평도로 돌아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이들이 많다. “우리 살던 데로 다시 가고 싶은데 어떻게 될지 모르가써.” 공혜순(80)씨가 북한말이 섞인 어투로 한탄했다. 옆에 앉은 남편 이기무(90)씨와 공씨의 고향은 황해도로, 6·25전쟁 때 갓난 딸을 둘러업고 피난을 와 인천에서 지내다가 20여년 전 연평도에 터를 잡았다. “연평도 산에 올라서면 우리 살던 동네의 모래사장이 내려다보이거든.” 남편 이씨가 인천에서 중공업 회사에 다니다 몸이 불편해진 뒤 고향이 보이는 연평도로 들어온 것이다. 연평도에서 공씨 부부는 고향에서처럼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며 살았다. 그러다 지난 23일 공씨는 60년 만에 다시 농작물과 가축들을 모두 놔둔 채 피난을 했다. 공씨는 “포격 소리가 너무 무섭고 폭탄 냄새 때문에 목구녕이 터질 것 같아서 나왔어. 연평도는 공기가 좋아 남편 병도 싹 나았는데, 이젠 다시 고향 같은 곳을 버리기 싫다”고 말했다. 임시 대피소에 하루종일 앉아 움직이지도 못하는 유문경(90)씨도 다시 연평도로 돌아갈 작정이다. 유씨는 무릎이 좋지 않아 제대로 걷기도 힘들다고 했다. “조상 대대로 연평도에서 살았어. 결혼도 연평도 처녀랑 하고. 나 같은 늙은이가 갈 데가 어딨어.” 유씨는 젊은 시절 10여년을 빼면 대부분의 삶을 연평도에서 보냈다. “20대 때는 연평도에서 조개 장사를 했지. 한철에 사나흘 팔면 일년 먹고살 돈이 생겼는데, 그땐 젊어서 여기저기 돈을 다 써버렸어.” 잠시 서울에서 재단사 일을 하다 다시 연평도로 돌아온 그는 김농사를 지었고, 나이가 들어서는 공공근로 등 소일거리를 하며 지냈다. “빨리 조상님들 묻혀 있는 연평도로 가야지. 아흔살 먹은 늙은이가 여기서 뭘 하겠어….” 연평도 인천/이승준 송채경화 기자 gamja@hani.co.kr
급식소엔 꽃게 90㎏ 기증 ‘통큰 어민’도
대피소 노인들 “고향 놔두고 어디를 가나” “물도 좋고 날씨도 좋아, 조업을 해야 하는데….” 30일 연평도 포구에서 만난 박철훈(56)씨는 한참 동안이나 바다를 바라봤다. 그러더니 주섬주섬 어구들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이날 오후엔 인천에 나가 있던 박씨의 어선이 연평도로 돌아왔다. 멸치잡이를 하는 박씨는 “이런 상황이 빨리 끝나야 되는데…. 내일 한-미 연합훈련이 끝나면 주민들이 좀 더 들어오고 언젠가는 다시 조업을 할 수 있지 않겠어요?”라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이날 인천에서 출발한 주민과 선원 18명이 연평도에 돌아왔다. 몇몇 어민들이 박씨처럼 어구를 손질하며 조업을 준비했다. 연평도 전체가 통제구역으로 설정돼 조업 재개가 불투명한 상황이지만, 선착장에 서 있던 어민들은 하나같이 당장 바다로 나가고 싶은 표정이었다. 박씨는 해병대에서 상근예비역으로 근무하는 아들 때문에 섬을 나가지 않고 어머니 김상숙(75)씨와 함께 머물고 있다. 그는 전날 “다들 고생이 너무 많다”며 대한적십자사가 연평초등학교에서 운영하는 무료급식소에 꽃게 90㎏을 내놓았다. 덕분에 먹을거리가 부족한 연평도의 자원봉사자와 시설복구 인력, 내외신 취재진 등이 ‘연평도 꽃게탕’을 맛보는 호사를 누리기도 했다. 섬을 떠나 인천의 임시 대피소에 머물고 있는 이들 중에서도 연평도로 돌아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이들이 많다. “우리 살던 데로 다시 가고 싶은데 어떻게 될지 모르가써.” 공혜순(80)씨가 북한말이 섞인 어투로 한탄했다. 옆에 앉은 남편 이기무(90)씨와 공씨의 고향은 황해도로, 6·25전쟁 때 갓난 딸을 둘러업고 피난을 와 인천에서 지내다가 20여년 전 연평도에 터를 잡았다. “연평도 산에 올라서면 우리 살던 동네의 모래사장이 내려다보이거든.” 남편 이씨가 인천에서 중공업 회사에 다니다 몸이 불편해진 뒤 고향이 보이는 연평도로 들어온 것이다. 연평도에서 공씨 부부는 고향에서처럼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며 살았다. 그러다 지난 23일 공씨는 60년 만에 다시 농작물과 가축들을 모두 놔둔 채 피난을 했다. 공씨는 “포격 소리가 너무 무섭고 폭탄 냄새 때문에 목구녕이 터질 것 같아서 나왔어. 연평도는 공기가 좋아 남편 병도 싹 나았는데, 이젠 다시 고향 같은 곳을 버리기 싫다”고 말했다. 임시 대피소에 하루종일 앉아 움직이지도 못하는 유문경(90)씨도 다시 연평도로 돌아갈 작정이다. 유씨는 무릎이 좋지 않아 제대로 걷기도 힘들다고 했다. “조상 대대로 연평도에서 살았어. 결혼도 연평도 처녀랑 하고. 나 같은 늙은이가 갈 데가 어딨어.” 유씨는 젊은 시절 10여년을 빼면 대부분의 삶을 연평도에서 보냈다. “20대 때는 연평도에서 조개 장사를 했지. 한철에 사나흘 팔면 일년 먹고살 돈이 생겼는데, 그땐 젊어서 여기저기 돈을 다 써버렸어.” 잠시 서울에서 재단사 일을 하다 다시 연평도로 돌아온 그는 김농사를 지었고, 나이가 들어서는 공공근로 등 소일거리를 하며 지냈다. “빨리 조상님들 묻혀 있는 연평도로 가야지. 아흔살 먹은 늙은이가 여기서 뭘 하겠어….” 연평도 인천/이승준 송채경화 기자 gam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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