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우씨
‘서해 5도’ 논문 쓴 백령도지킴이 김필우씨
옹진반도 포기로 고립자초
남북 평화협정·이동권 보장
주민 위한 근본대책 절실 지난달 29일 백령도에서 김필우(62·사진)씨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면장갑에 고무장화를 신고 집앞 텃밭을 돌보고 있었다. 웃으며 인사를 건넸을 때도 고개만 끄덕일 뿐 무뚝뚝한 표정으로 일손을 놓지 않았다. 이후 여러 차례 그와 마주쳤어도 반응은 언제나 비슷했다. 무뚝뚝하고 평범한 촌로로 보였지만, 이웃 주민들은 그를 두고 ‘연평도 포격으로 고립된 백령도의 상황을 누구보다 안타까워할 사람’이라고 귀띔했다. 왜일까. 김씨 가족은 9대째 백령도에서 살고 있다. 그런 김씨가 지난 2월 <서해 5도서의 지역적 특성과 이동권 보장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으로 인하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꼬박 3년 동안 서해 5도가 왜 고립됐고, 주민들의 기본권 보장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등을 연구한 결과물이다. 김씨는 논문에서 “서해 5도가 고립된 화약고가 된 이유는 우선 유엔군이 휴전 협정 시 옹진반도를 내버리듯 포기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와 함께 “1953년 유엔군이 선포한 북방한계선(NLL)은 해상 군사 분계선이 아닌 ‘최북단 해상 순찰 제한선’ 정도의 수준이어서 서해 5도 해상이 언제나 충돌이 가능한 화약고로 남게 된 것”이라고 평가했다. 서해 5도 가운데 면적이 47㎢로 가장 큰 백령도의 주민들은 해방 전까지만 해도 북한의 장산곶 옆에 있는 덕등포를 왕래했다고 한다. 해방 뒤 38도선이 그어질 때만 해도 서해 5도는 38선 이남의 옹진반도에 묶였다. 하지만 6·25 전쟁 이후 옹진반도가 북한 땅이 되고 서해 5도는 남한 땅이 되면서, 백령도 주민들은 뭍으로 나가려면 17㎞ 떨어진 북한의 장산곶이 아니라 180㎞ 떨어진 인천항으로 가야 했다. 김씨는 논문에서 “‘남북한 평화협정’ 체결 등을 통해 북방한계선의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고, 파도가 3m만 돼도 여객선 운항을 못 하는 섬 주민들의 이동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서해 5도’에 대한 그의 집념은 이뿐 아니다. 그는 1995년 백령도 여객선 대책위원장을 맡아 백령도 주민들의 여객선 승선비 인하 투쟁을 이끌었고, 이 때문에 당시 직장이던 옹진축협에서 면직되기도 했다. 2002년에는 인천시의회 의원이 되어 서해 5도 주민의 뱃삯 대부분을 인천시 예산으로 지원하는 조례를 발의해 제정했다. 현재 백령도 농협조합장인 그는 “백령도 주민의 이동권 문제는 서해 5도 고립 문제의 본질과 맞닿아 있다”고 지적한다.
연평도 포격 이후 그의 걱정은 더 커졌다. 김씨는 “불안전한 엔엘엘을 그어 놓고 서해 5도 주민들에게 안심하라고 말하는 것은 한심한 발상”이라며 “우리가 무슨 인간방패냐”고 되물었다. 그는 정부가 마련한다는 ‘서해 5도 특별법’에 대해서도 우려를 드러냈다. “급하게 보여주기식으로 만들어서는 곤란하고, 서해 5도 고립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서 주민들의 기본권을 최대한 보장하는 쪽으로 특별법이 만들어져야 한다.” 긴장감이 높아져도 백령도를 떠날 생각이 없다는 그는 “섬 주민들이 고립된 채 국가 안보를 위해 희생하며 살고 있다는 점을 국가가 분명히 알고 고마워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백령도/글·사진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남북 평화협정·이동권 보장
주민 위한 근본대책 절실 지난달 29일 백령도에서 김필우(62·사진)씨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면장갑에 고무장화를 신고 집앞 텃밭을 돌보고 있었다. 웃으며 인사를 건넸을 때도 고개만 끄덕일 뿐 무뚝뚝한 표정으로 일손을 놓지 않았다. 이후 여러 차례 그와 마주쳤어도 반응은 언제나 비슷했다. 무뚝뚝하고 평범한 촌로로 보였지만, 이웃 주민들은 그를 두고 ‘연평도 포격으로 고립된 백령도의 상황을 누구보다 안타까워할 사람’이라고 귀띔했다. 왜일까. 김씨 가족은 9대째 백령도에서 살고 있다. 그런 김씨가 지난 2월 <서해 5도서의 지역적 특성과 이동권 보장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으로 인하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꼬박 3년 동안 서해 5도가 왜 고립됐고, 주민들의 기본권 보장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등을 연구한 결과물이다. 김씨는 논문에서 “서해 5도가 고립된 화약고가 된 이유는 우선 유엔군이 휴전 협정 시 옹진반도를 내버리듯 포기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와 함께 “1953년 유엔군이 선포한 북방한계선(NLL)은 해상 군사 분계선이 아닌 ‘최북단 해상 순찰 제한선’ 정도의 수준이어서 서해 5도 해상이 언제나 충돌이 가능한 화약고로 남게 된 것”이라고 평가했다. 서해 5도 가운데 면적이 47㎢로 가장 큰 백령도의 주민들은 해방 전까지만 해도 북한의 장산곶 옆에 있는 덕등포를 왕래했다고 한다. 해방 뒤 38도선이 그어질 때만 해도 서해 5도는 38선 이남의 옹진반도에 묶였다. 하지만 6·25 전쟁 이후 옹진반도가 북한 땅이 되고 서해 5도는 남한 땅이 되면서, 백령도 주민들은 뭍으로 나가려면 17㎞ 떨어진 북한의 장산곶이 아니라 180㎞ 떨어진 인천항으로 가야 했다. 김씨는 논문에서 “‘남북한 평화협정’ 체결 등을 통해 북방한계선의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고, 파도가 3m만 돼도 여객선 운항을 못 하는 섬 주민들의 이동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서해 5도’에 대한 그의 집념은 이뿐 아니다. 그는 1995년 백령도 여객선 대책위원장을 맡아 백령도 주민들의 여객선 승선비 인하 투쟁을 이끌었고, 이 때문에 당시 직장이던 옹진축협에서 면직되기도 했다. 2002년에는 인천시의회 의원이 되어 서해 5도 주민의 뱃삯 대부분을 인천시 예산으로 지원하는 조례를 발의해 제정했다. 현재 백령도 농협조합장인 그는 “백령도 주민의 이동권 문제는 서해 5도 고립 문제의 본질과 맞닿아 있다”고 지적한다.
연평도 포격 이후 그의 걱정은 더 커졌다. 김씨는 “불안전한 엔엘엘을 그어 놓고 서해 5도 주민들에게 안심하라고 말하는 것은 한심한 발상”이라며 “우리가 무슨 인간방패냐”고 되물었다. 그는 정부가 마련한다는 ‘서해 5도 특별법’에 대해서도 우려를 드러냈다. “급하게 보여주기식으로 만들어서는 곤란하고, 서해 5도 고립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서 주민들의 기본권을 최대한 보장하는 쪽으로 특별법이 만들어져야 한다.” 긴장감이 높아져도 백령도를 떠날 생각이 없다는 그는 “섬 주민들이 고립된 채 국가 안보를 위해 희생하며 살고 있다는 점을 국가가 분명히 알고 고마워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백령도/글·사진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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