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잠원동 ‘묻지마 살인사건’ 현장검증
지난 5일 서울 서초구 잠원동에서 발생했던 이른바 ‘묻지마 살인사건’의 현장검증이 21일 진행됐다. 미국 명문대를 다니다 중퇴하고 귀국한 청년이 집안에서 게임 등으로 시간을 보내다 충동적으로 저지른 범행이라는 점에서 이 사건은 시민들에게 큰 충격을 줬다.
이날 현장검증은 오전 11시 피의자 박아무개(23)씨가 포승줄에 묶인 채 자신이 살던 ㅎ아파트단지에 도착하면서 시작됐다. 범행 당일처럼 후드티셔츠의 모자를 덮어쓰고 마스크를 쓴 차림이었다. 경찰이 박씨의 오른손에 골판지로 만든 흉기를 쥐어주자, 박씨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
이후 박씨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150여 걸음을 걸어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갔다. 흉기를 손에 꼭 쥔 채였다. 피해자 역할을 담당한 형사가 박씨 앞을 지나쳐 걸어가기 시작했다. 박씨의 눈빛이 그를 좇기 시작했고, 곧 걸음이 빨라졌다. 박씨는 5일 새벽 6시30분께 인근 폐쇄회로텔레비전(CCTV) 화면에 찍힌 모습 그대로를 담담하게 재연했다.
당시 박씨는 잠원동의 한 성당에서 새벽 미사를 마치고 나오던 김아무개(26)씨를 따라가 흉기로 잔인하게 찔러 살해했다. 새벽까지 게임을 하던 박씨가 “밖에 나가 처음 만나는 사람을 죽이겠다”고 생각하고 집을 나선 지 채 몇 분 지나지 않아 발생한 일이었다. 범행 현장에서 박씨는 자신의 발걸음 속도와 이동 경로, 흉기를 쥔 방식 등을 상세히 기억해 재연했다.
컴퓨터 격투 게임에 심취했던 것으로 알려진 박씨는 특히 흉기를 휘두른 방식을 세밀히 묘사하기도 했다. 피해자의 등을 찌를 때는 오른손으로 흉기를 들고 왼손으로 오른쪽 손목을 받쳤다. 그는 도망가기 위해 몸을 비튼 피해자에게 흉기를 휘두르는 장면도 그대로 반복했다.
현장검증에 나온 박씨의 몸짓은 거칠었지만, 말투는 온순했다. 범행 위치를 재차 확인하는 경찰에게 “잘 기억이 안나는데, 여기가 맞는 것 같은데요”라고 말했다.
현장검증은 박씨가 범행 뒤 흉기를 티셔츠 왼쪽 소매에 집어넣고 아파트 단지의 담장을 뛰어넘어 집에 들어가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1시간 만에 끝났다. 현장검증을 지켜보던 주민 김아무개(46)씨는 “내가 사는 동네에 살인사건이 발생했다는 소식에 불안했는데 범인이 같은 아파트 주민일 줄을 꿈에도 생각 못했다”며 몸서리를 쳤다. 경찰은 박씨의 정신병 병력 등을 추가로 확인할 계획이다.
박태우 기자 eh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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