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장모님 빈대떡’에서 만난 권명숙(48)씨가 용산참사로 숨진 남편 고 이성수씨와의 추억과 상흔(21)·상현(19) 두 아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이야기하다 눈물짓고 있다. 장례식 뒤 집에만 머물던 권씨는 “몸을 혹사시켜 잡념을 없애야겠다”며 지난 10월 식당을 열었다. 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그 뒤 1년] 용산참사 합의 1년…빈대떡 장사나선 권명숙씨
지난해 1월20일 서울 용산구 한강로2가 남일당 건물에 올랐던 철거민들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철거민 5명과 경찰특공대원 1명이 숨졌다. 이른바 ‘용산참사’다. 철거민 유가족 등 용산참사 범국민대책위원회는 1년의 투쟁 끝에 지난해 12월30일 서울시 등과 보상금 등에 합의하고 사건 발생 355일 만에 장례를 치렀다. 그러나 협상 1년이 지났지만 합의 내용에 포함된 용산 4구역 세입자 생계대책이나, 참사 원인이 된 재개발 제도의 근본적인 개선은 이뤄지지 않았다. 장례식을 치른 이후 유족들의 삶과, 재발 방지 대책 마련을 위한 시민사회의 노력 등을 짚어본다.
검은 옷은 이제 싫어
가장 떠나고 심한 우울증
잡념 없애려 바쁜 식당 내
요즘도 가스불 보면 ‘울컥’ 녹두빈대떡, 동그랑땡, 꼬치전이 고소한 냄새를 풍기며 지글지글 익었다. 접시 한가득 나온 모둠전을 보고 가게를 찾은 지인들이 “오~” 하는 탄성을 질렀다. 권명숙(48)씨가 “내가 원래 솜씨가 좋았잖아”라고 받아쳤다. 지난 28일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에 있는 ‘장모님 빈대떡’에서 만난 권씨는 저녁 손님들을 맞고 있었다. 여느 음식집 주인과 다르지 않은, 밝고 붙임성 좋은 빈대떡집 사장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날의 상처까지 모두 숨기진 못했다. “검은 옷은 이젠 싫다”며 분홍색 앞치마를 입었고, 문득 가스불을 보며 “불에 얼마나 데었는데”라며 울컥했다. 그는 지난해 1월20일 용산참사로 남편 이성수씨를 잃었다. 그 뒤 1년의 싸움 끝에 남편을 땅에 묻었고, 지금은 두 아들을 키우며 바쁘게 산다. 가게를 낸 건 지난 10월이었다. 장례식과 용산참사 1주기 추모식을 마친 뒤 권씨는 잠시 친정어머니와 함께 지내다 참사 전 남편과 함께 살던 용인시 수지구로 돌아왔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것에 대한 보상금으로 권씨 가족은 전셋집을 구했다. 권씨는 “차가운 천막에서 살다 간 사람을 생각하면, 집에 발 뻗고 누워 있는 것만으로도 미안할 때가 있다”고 담담히 말했다. 권씨 부부는 사업에 실패하고 붕어빵 등을 파는 노점상을 하며 수지구 신봉동에 월셋집을 얻어 살았었다. 이 월셋집이 철거되면서 2008년 5월부터 용산참사 직전까지 월셋집 터에 천막을 짓고 버텼다. 그러던 중 남편은 용산에 연대투쟁을 나갔다가 변을 당했다. 장례를 치르고 난 뒤 권씨는 ‘아는 사람을 만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남편 먼저 보낸 여자’라는 자격지심에 한동안 집밖에 나가지 못했다. 심하게 우울한 날이면 13층 집에서 ‘떨어질까’ 하는 생각도 했다고 한다. ‘아빠도 없는데 나마저 이러면 우리 애들은 어쩌나’ 하는 마음에 권씨는 동생에게 돈을 빌려 빈대떡집을 냈다. 다른 생각이 들지 않도록 몸을 바쁘게 놀리는 일이 필요했다. 용산 한번도 안 찾아 군인아들 홀로 면회 속상해
‘남편 노래’ 부르며 눈물도
정부 생계대책 아직 안지켜 큰아들 상흔(21)씨뿐 아니라 작은아들 상현(19)군도 그사이 군대에 갔다. 경기도 포천에 있는 큰아들은 면회라도 갈 수 있지만, 전방인 강원도 인제의 작은아들은 연평도 포격 뒤 연락이 어려워졌다. 지난 성탄절엔 큰아들을 찾아가 부대 동료들에게 치킨, 피자 등을 샀다. 그래도 권씨는 아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또 했다. “다른 가족들은 아빠, 엄마와 함께 집에서 만들어 온 음식을 먹으며 ‘지지고 볶고’ 하는데, 나는 아들에게 그렇게 해주지 못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한다. 속상한 마음에 그날 저녁 혼자 노래방에 가서 남편이 제일 좋아했던 노래 ‘당신’ 등을 부르다 눈물도 흘렸다. 권씨는 “남편이 활동적이어서 예전엔 12월이면 부부동반 연말 모임으로 바빴는데, 아직도 연말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적응이 안 된다”고 말했다. “빈대떡 빚다가 울컥하는 마음이 들면 뒤집개도 던지고 그래요.” 아직 아물지 않은 마음의 상처 때문에 권씨는 용산을 떠난 뒤 한 번도 그곳을 다시 찾지 않았다. 때때로 남편이 그리울 때면 남편이 묻힌 경기도 남양주시 모란공원에 다녀온다. 2주 전 아들이 “아빠가 꿈에 나와 왜 안 오냐고 한다”고 말해, 매화와 국화를 한아름 사서 두고 왔다. 함께 숨진 김남훈 경사에 대해서도 “같은 희생자인데, 죽음 앞에 강자, 약자가 어디 있겠느냐. 젊디젊은 아까운 애 잃었는데 자식 가슴에 묻은 부모 마음이 오죽할까 싶다”고 말했다. 남편은 죽기 전 남일당 건물 옥상 망루에서 지상의 아내에게 하트 모양을 그려 보여줬다. 그 남편이 불에 타 돌아오자 “눈에 보이는 게 없어 1년을 싸웠다”고 했다. 용산참사의 진실 규명을 바라는 마음은 지금도 여전하지만, ‘달걀로 바위치기 격’이었다는 무력감과 생계 문제로 이젠 나서기도 쉽지 않다. 권씨는 “이제 뒷바라지 잘해서 애들 잘 크고, 우리 세 식구 잘사는 게 남은 꿈”이라고 말했다. 용인/김민경 기자 salmat@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 MB 지지율 50% 넘었는데 한나라당은 떨떠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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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념 없애려 바쁜 식당 내
요즘도 가스불 보면 ‘울컥’ 녹두빈대떡, 동그랑땡, 꼬치전이 고소한 냄새를 풍기며 지글지글 익었다. 접시 한가득 나온 모둠전을 보고 가게를 찾은 지인들이 “오~” 하는 탄성을 질렀다. 권명숙(48)씨가 “내가 원래 솜씨가 좋았잖아”라고 받아쳤다. 지난 28일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에 있는 ‘장모님 빈대떡’에서 만난 권씨는 저녁 손님들을 맞고 있었다. 여느 음식집 주인과 다르지 않은, 밝고 붙임성 좋은 빈대떡집 사장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날의 상처까지 모두 숨기진 못했다. “검은 옷은 이젠 싫다”며 분홍색 앞치마를 입었고, 문득 가스불을 보며 “불에 얼마나 데었는데”라며 울컥했다. 그는 지난해 1월20일 용산참사로 남편 이성수씨를 잃었다. 그 뒤 1년의 싸움 끝에 남편을 땅에 묻었고, 지금은 두 아들을 키우며 바쁘게 산다. 가게를 낸 건 지난 10월이었다. 장례식과 용산참사 1주기 추모식을 마친 뒤 권씨는 잠시 친정어머니와 함께 지내다 참사 전 남편과 함께 살던 용인시 수지구로 돌아왔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것에 대한 보상금으로 권씨 가족은 전셋집을 구했다. 권씨는 “차가운 천막에서 살다 간 사람을 생각하면, 집에 발 뻗고 누워 있는 것만으로도 미안할 때가 있다”고 담담히 말했다. 권씨 부부는 사업에 실패하고 붕어빵 등을 파는 노점상을 하며 수지구 신봉동에 월셋집을 얻어 살았었다. 이 월셋집이 철거되면서 2008년 5월부터 용산참사 직전까지 월셋집 터에 천막을 짓고 버텼다. 그러던 중 남편은 용산에 연대투쟁을 나갔다가 변을 당했다. 장례를 치르고 난 뒤 권씨는 ‘아는 사람을 만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남편 먼저 보낸 여자’라는 자격지심에 한동안 집밖에 나가지 못했다. 심하게 우울한 날이면 13층 집에서 ‘떨어질까’ 하는 생각도 했다고 한다. ‘아빠도 없는데 나마저 이러면 우리 애들은 어쩌나’ 하는 마음에 권씨는 동생에게 돈을 빌려 빈대떡집을 냈다. 다른 생각이 들지 않도록 몸을 바쁘게 놀리는 일이 필요했다. 용산 한번도 안 찾아 군인아들 홀로 면회 속상해
‘남편 노래’ 부르며 눈물도
정부 생계대책 아직 안지켜 큰아들 상흔(21)씨뿐 아니라 작은아들 상현(19)군도 그사이 군대에 갔다. 경기도 포천에 있는 큰아들은 면회라도 갈 수 있지만, 전방인 강원도 인제의 작은아들은 연평도 포격 뒤 연락이 어려워졌다. 지난 성탄절엔 큰아들을 찾아가 부대 동료들에게 치킨, 피자 등을 샀다. 그래도 권씨는 아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또 했다. “다른 가족들은 아빠, 엄마와 함께 집에서 만들어 온 음식을 먹으며 ‘지지고 볶고’ 하는데, 나는 아들에게 그렇게 해주지 못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한다. 속상한 마음에 그날 저녁 혼자 노래방에 가서 남편이 제일 좋아했던 노래 ‘당신’ 등을 부르다 눈물도 흘렸다. 권씨는 “남편이 활동적이어서 예전엔 12월이면 부부동반 연말 모임으로 바빴는데, 아직도 연말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적응이 안 된다”고 말했다. “빈대떡 빚다가 울컥하는 마음이 들면 뒤집개도 던지고 그래요.” 아직 아물지 않은 마음의 상처 때문에 권씨는 용산을 떠난 뒤 한 번도 그곳을 다시 찾지 않았다. 때때로 남편이 그리울 때면 남편이 묻힌 경기도 남양주시 모란공원에 다녀온다. 2주 전 아들이 “아빠가 꿈에 나와 왜 안 오냐고 한다”고 말해, 매화와 국화를 한아름 사서 두고 왔다. 함께 숨진 김남훈 경사에 대해서도 “같은 희생자인데, 죽음 앞에 강자, 약자가 어디 있겠느냐. 젊디젊은 아까운 애 잃었는데 자식 가슴에 묻은 부모 마음이 오죽할까 싶다”고 말했다. 남편은 죽기 전 남일당 건물 옥상 망루에서 지상의 아내에게 하트 모양을 그려 보여줬다. 그 남편이 불에 타 돌아오자 “눈에 보이는 게 없어 1년을 싸웠다”고 했다. 용산참사의 진실 규명을 바라는 마음은 지금도 여전하지만, ‘달걀로 바위치기 격’이었다는 무력감과 생계 문제로 이젠 나서기도 쉽지 않다. 권씨는 “이제 뒷바라지 잘해서 애들 잘 크고, 우리 세 식구 잘사는 게 남은 꿈”이라고 말했다. 용인/김민경 기자 salmat@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 MB 지지율 50% 넘었는데 한나라당은 떨떠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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