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당 조봉암 사건 관련자들
56년 대통령선거 돌풍 위기감
군·검·경 등 동원 ‘제거 공작’
재심 기각 17시간만에 형 집행
군·검·경 등 동원 ‘제거 공작’
재심 기각 17시간만에 형 집행
52년만에 무죄 ‘조봉암 사건’
“이러한 판사들을 처리하는 방법은 없는가… 조봉암 사건 1심 판결은 말이 안 된다. 그때에 판사를 처단하려 하였으나 여러 가지 점을 생각하여서 중지하였다… 헌법을 고쳐서라도 이런 일이 없도록 엄정하여야 한다.”
1958년 10월25일 서울고법 항소심 재판부가 조봉암 진보당 당수에게 간첩 혐의를 적용해 사형을 선고한 직후, 당시 국무회의에서 홍진기 법무부 장관의 보고를 받은 이승만 대통령의 발언이다. 이전에도 시국사건 등에서 무죄 판결이 나올 때마다 사법부를 대놓고 비난하던 이 대통령은, 앞서 1심 재판부가 조봉암에게 징역 5년의 ‘가벼운’ 형을 선고하자 “처단” 운운한 것이다. 이 대통령은 며칠 뒤 1심 재판장으로 조봉암에게 일부 무죄를 선고한 유병진 서울지법 부장판사를 재임용에서 탈락시키며 스스로 말한 ‘처단’을 실행에 옮겼다.
조봉암 사건은 ‘정권-경찰-육군특무대-검찰-사법부’가 총체적으로 동원된 ‘정치 테러’였다는 게 역사적 평가다. 2007년 9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조봉암이 이승만 정권에 위협적인 정치인으로 부상하자, 진보당과 조봉암을 제거하려는 의도로 표적수사에 나서 처형에 이르게 한 반인권적 정치탄압 사건”이라고 규정했고, 이를 근거로 이번 재심이 청구됐다. 일제 강점기 공산주의자로 독립운동을 했지만 해방 뒤 조선공산당을 탈당한 조봉암은 초대 농림부 장관, 국회 부의장 등 정부 고위직을 지냈다. 혁신계 인사들을 모아 진보당 창당을 준비하던 그는 56년 5월 대통령 선거에서 유효득표수의 29%인 216여만표(이승만 후보는 500여만표)를 얻어 이승만의 강력한 ‘정적’으로 떠올랐다. 당시엔 조봉암의 ‘선전’을 두고 “투표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 진보당 창당 뒤 민의원 총선을 넉달여 앞둔 58년 1월, 이 대통령의 ‘정적 제거’ 작전이 개시됐다. 서울시경은 ‘조봉암을 만났다’는 북한 공작원들의 진술만으로 그를 체포하며 수사에 나섰다. 이어 민간인 수사권이 없는 육군특무대가 가세했고, 이 과정에서 관련자들에 대한 영장 없는 불법 구금과 약물 투여 등이 저질러졌다. 검찰도 공소사실을 제대로 특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서둘러 기소했다가 9일 뒤 재차 기소하는 등 피의자의 권리는 보호받지 못했다. 1심 재판부는 21차례의 공판 끝에 간첩 혐의 등에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항소심 재판부는 조봉암 및 진보당과 북한의 유일한 ‘연결고리’인 양이섭의 ‘진술’이 1심과 달리 완전히 번복됐음에도 조봉암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대법원도 원심 판결을 확정해 사형을 언도했다.
20일 대법원이 조봉암에게 무죄를 선고하긴 했지만, ‘민간인 수사권이 없는 육군특무대가 수사를 했다’는 명백한 재심 사유를 인정하고 재심 재판을 시작하기까지 무려 2년이 넘게 걸렸다. 이 과정에서 조봉암을 기소했던 검찰은 “뚜렷한 증거 없이 과거의 판결을 뒤집는 것은 옳지 않다”며 시대에 역행하는 ‘재심개시 반대 의견서’를 대법원에 내기도 했다.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죽산 조봉암 선생의 장녀 조호정(오른쪽 둘째)씨가 20일 오후 서울 서초동 대법원에서 열린 진보당 조봉암 사건 재심 판결에서 무죄가 선고된 뒤, ‘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 김용기(맨 오른쪽) 회장,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왼쪽 둘째) 등 관계자들과 기뻐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조봉암 사건은 ‘정권-경찰-육군특무대-검찰-사법부’가 총체적으로 동원된 ‘정치 테러’였다는 게 역사적 평가다. 2007년 9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조봉암이 이승만 정권에 위협적인 정치인으로 부상하자, 진보당과 조봉암을 제거하려는 의도로 표적수사에 나서 처형에 이르게 한 반인권적 정치탄압 사건”이라고 규정했고, 이를 근거로 이번 재심이 청구됐다. 일제 강점기 공산주의자로 독립운동을 했지만 해방 뒤 조선공산당을 탈당한 조봉암은 초대 농림부 장관, 국회 부의장 등 정부 고위직을 지냈다. 혁신계 인사들을 모아 진보당 창당을 준비하던 그는 56년 5월 대통령 선거에서 유효득표수의 29%인 216여만표(이승만 후보는 500여만표)를 얻어 이승만의 강력한 ‘정적’으로 떠올랐다. 당시엔 조봉암의 ‘선전’을 두고 “투표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 진보당 창당 뒤 민의원 총선을 넉달여 앞둔 58년 1월, 이 대통령의 ‘정적 제거’ 작전이 개시됐다. 서울시경은 ‘조봉암을 만났다’는 북한 공작원들의 진술만으로 그를 체포하며 수사에 나섰다. 이어 민간인 수사권이 없는 육군특무대가 가세했고, 이 과정에서 관련자들에 대한 영장 없는 불법 구금과 약물 투여 등이 저질러졌다. 검찰도 공소사실을 제대로 특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서둘러 기소했다가 9일 뒤 재차 기소하는 등 피의자의 권리는 보호받지 못했다. 1심 재판부는 21차례의 공판 끝에 간첩 혐의 등에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항소심 재판부는 조봉암 및 진보당과 북한의 유일한 ‘연결고리’인 양이섭의 ‘진술’이 1심과 달리 완전히 번복됐음에도 조봉암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대법원도 원심 판결을 확정해 사형을 언도했다.
20일 대법원이 조봉암에게 무죄를 선고하긴 했지만, ‘민간인 수사권이 없는 육군특무대가 수사를 했다’는 명백한 재심 사유를 인정하고 재심 재판을 시작하기까지 무려 2년이 넘게 걸렸다. 이 과정에서 조봉암을 기소했던 검찰은 “뚜렷한 증거 없이 과거의 판결을 뒤집는 것은 옳지 않다”며 시대에 역행하는 ‘재심개시 반대 의견서’를 대법원에 내기도 했다.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