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문화방송> 예능프로그램인 ‘무한도전’이 동춘서커스단을 찾아갔을 때 그곳에서 마술사로 일하던 권영호씨가 출연진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무한도전’ 화면 갈무리
18살 무작정 서커스단 따라가
잽싼 손놀림·말솜씨로 ‘전성기’
TV 등 등장에 서커스단 줄도산
임금도 다 못 받고 갈 곳 잃어
“다시 하라면 잘할 수 있는데…”
잽싼 손놀림·말솜씨로 ‘전성기’
TV 등 등장에 서커스단 줄도산
임금도 다 못 받고 갈 곳 잃어
“다시 하라면 잘할 수 있는데…”
권영호(63·위 사진)씨는 매일 새벽 경기도 안성시의 한 인력사무소에 나간다. 일거리를 찾아 막노동판을 전전한 지 2년 남짓, 손바닥에는 굳은살이 박였고 새까만 손끝은 갈라졌다.
“마술사는 손이 굳으면 안 되는데….” 2009년까지 그는 서커스단의 마술사였다. 그의 손끝에서 갑자기 꽃이 피기도 하고, 하얀 비둘기가 날개를 퍼덕였다. 그렇게 서커스단에서 40여년을 보냈다.
경북 구미에서 태어난 그는 전쟁과 가난 때문에 국민학교(초등학교) 졸업장을 간신히 받았다. 18살이 되던 해에 동네에 ‘동남 서커스단’이 들어와 한 달을 머물렀다. 동네를 벗어나 본 적이 없던 권씨에겐 온 세상을 돌아다니는 서커스단이 ‘구원’처럼 보였다. 그길로 무작정 서커스단을 따라나섰다.
처음엔 무대 설치와 청소 등 허드렛일을 도맡아 했다. 마술이나 곡예는 어깨너머로 배웠다. 단장이 가끔 용돈을 쥐여줄 뿐 월급이란 건 아예 없었고, 일년 내내 전국을 떠돌다보니 가정을 꾸리는 일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는 “그래도 마냥 좋았다”고 했다. 서커스단에 합류한 지 7년 만에 마술사 보조를 시작한 그는 몇 년 뒤 곡예도 배웠고, 20대 후반엔 기타를 치며 밴드를 했다. 서커스 사회도 봤다. 잽싼 손놀림 덕에 그의 손마술은 최고라는 평을 들었고, 관객들의 박수를 잘 유도해 내는 사회자로도 인기를 누렸다. 권씨는 1970~80년대 대한마술단, 뉴서울, 대우 등을 거치며 인생의 ‘전성기’를 누렸다.
컬러텔레비전과 노래방, 컴퓨터가 등장하면서 서커스의 인기가 급격히 쇠락했다. 1970년대에 14~15개에 이르던 서커스단은 1995년에 동춘·비룡·대우·천광 등 4개만 남았다. 한국 서커스의 흥망과 함께했던 그의 인생도 점차 내리막길을 걸었다. 2005년 봄, 권씨가 있던 ‘대우 서커스단’도 결국 문을 닫았다. 그 뒤 동료들과 경남 마산 ‘돛섬 유원지’에서 관광객을 상대로 마술을 했지만, 공연 시간은 하루에 겨우 20분 남짓에 불과했다. 월급 150만원을 받던 그 생활마저 태풍 ‘매미’가 유원지를 휩쓸고 간 뒤 끝이 났다.
2006년 봄 권씨는 마지막 서커스단 ‘동춘’에 들어갔지만, 사정은 좋지 않았다. 관객은 줄고, 단원의 절반 이상이 중국인으로 채워져 있었다. 이미 나이가 든 그에겐 정식 공연 전 간단한 마술을 진행하는 ‘바람잡이’ 구실이 돌아왔다. 100만원 남짓한 월급은 정해진 때도 없이 30만원, 40만원씩 통장에 입금됐다. 4년 만에 권씨는 동춘을 그만뒀다. 그리고 지금은 동춘을 상대로 퇴직금과 밀린 임금을 달라며 소송을 진행중이다.
하지만 그는 평생 서커스와 함께해온 자신의 삶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나는 서커스밖에 모르는 ‘우물 안 개구리’였던 것 같아. 그래도 그 시절 사람들한테 재미를 많이 줬잖아. 떠도는 유랑생활이 나한테 잘 맞았던 것 같기도 하고. 지금 다시 서커스 하라고 하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모아놓은 돈도 가족도 없고 몸은 이미 쇠약해졌지만, 서커스단 시절을 떠올릴 때 권씨의 표정엔 18살 집을 나설 당시의 설렘이 묻어났다. 글·사진 이유진 기자 yjlee@hani.co.kr
“나는 서커스밖에 모르는 ‘우물 안 개구리’였던 것 같아. 그래도 그 시절 사람들한테 재미를 많이 줬잖아. 떠도는 유랑생활이 나한테 잘 맞았던 것 같기도 하고. 지금 다시 서커스 하라고 하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모아놓은 돈도 가족도 없고 몸은 이미 쇠약해졌지만, 서커스단 시절을 떠올릴 때 권씨의 표정엔 18살 집을 나설 당시의 설렘이 묻어났다. 글·사진 이유진 기자 y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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