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5월28일 결성대회 직후 민주당사에서 단식농성을 하다 탈진해 연세대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던 윤영규 전조교 초대 위원장은 6월6일 끝내 경찰에 연행됐다.(왼쪽) 이후 해직된 상태에서 많은 구속 동지의 옥바라지와 재판 참관을 하느라 마음고생을 하던 필자에게 동료교사가 위로를 담아 보내준 자작시 ‘사모곡’ 원문.(오른쪽)
정해숙-아름다운 선생님의 멘토 60
1989년 8월3일 해임 통지서를 받은 나는 바로 다음날 우편으로 광주시 교육위원회(현 교육청)로 통지서를 반송했다. 이후 10월까지 석달 동안 서울과 목포, 광주를 오가며 구속 수감된 전교조 동지들을 면회하고, 재판 방청을 하는 게 일과가 되다시피 했다.
5월28일 전교조 결성대회 직후 민주당사에서 농성을 하던 윤영규 위원장을 비롯해 이수호 사무처장, 김석근 총무부장, 신맹순 인천지부장, 고진형 전남지부장이 구속되었다. 뒤이어 결성된 15개 지부 가운데 8개 지부장 역시 연행됐고, 김민곤·김남선·고은수·오종렬 선생님 등 수많은 간부들이 연달아 잡혀 들어갔다. 구치소에서나 재판정에서나 동지들은 의연하고 당당했다. 하지만 앞장서 고통을 받아야 하는 동지들을 바라보는 내 심정은 안타까웠다.
그즈음 효광여중 동료였던 미술과 강만 선생님이 보내준 자작시 ‘사모곡’은 큰 위안이 되었다. 현장에 남아 있던 동료교사들은 이렇듯 다양한 형태로 마음을 모아 고난한 우리의 행진을 응원했다.
‘누군들 기억하지 못하랴/ 우리들 교정 풀섶마다에 맺힌/ 백목련 향기 같은 음성이여/ 가슴으로 돌돌돌 낮게 흐르는/ 강물소리 아파라. 오백년 푸른 선비 혼 치마 결에 숨기고/ 봄볕 같은 미소 교단에 흘리던 님아/ 오늘은 어느 땅 등 굽은 언덕에 서서/ 청청한 노래 부르는가. 칼 앞에 빛나던 의로운 피/ 우리들 영혼 속에 불꽃으로 간직하리니/ 동방의 새벽 범종소리 울리면/ 그대 힘찬 빛으로 살아서 오라. -정해숙 선생님께-’
예상을 훨씬 뛰어넘은 1500명의 해직교사가 교문 밖으로 나오게 되면서 생계대책 문제가 전교조의 주요 현안으로 떠올랐다. 초기 6~7월엔 본부에서 최저생계비나마 일괄지급했다. 그러나 8월 들어 지부별로 지급하면서 형편에 따라 10만~30만원을 지급하거나 아예 못 주는 곳도 있었다. 이에 생계대책특별위원회를 구성해 의류·가방·문구류·달력 같은 기념품 제작과 판매, 출판사업, 기금마련 기획전시 등으로 재원을 모으기로 했다.
2학기 개학을 계기로 해직교사들은 출근투쟁을 시작했다. 해직의 부당함과 거부의 뜻을 알리고, 동료교사들과 격리시키려는 당국의 의도를 깨기 위한 대응전략이었다. 문교부 역시 출근투쟁 저지 지시로 맞섰다. 그럼에도 현장에 남아 있던 조합원들은 보강 거부, 리본 달기, 징계철회 요구 서명 등을 적극 벌였다. 학생들의 지지 또한 뜨거웠다. 그러나 학교 쪽은 육성회 학부모들을 동원하거나 백골단까지 학내로 난입시켜 해직교사와 호응하는 학생들을 끌어냈다. 교문은 더 이상 학교와 사회를 잇는 통로가 아니라 학교를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는 벽이었다.
이처럼 정권의 극단적 탄압이 거세지자 조합원들이 차츰 탈퇴하기 시작했다. 그해 5월14일 발기인대회 때 1만7000여명이던 조합원은 7월 명단 공개 때에는 1만2500여명으로, 9월에는 3000여명으로 줄어들었다.
이에 9월 초 전교조 집행부는 비공개 현장 조합원을 인정하고 후원회원을 조직하기로 방침을 세웠다. 덕분에 조직은 급격히 복원되어 12월에는 조합원이 9300여명, 후원회원이 2만3000여명으로 회복되었다. 이듬해 2월 2대 위원장 선거 때는 조합원 9877명, 후원회원 2만9484명으로 대중적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후원회원 확보가 가능했던 주요 이유는 해직교사들의 학교현장 방문 효과였다. 징계저지 투쟁의 하나로 진행했던 출근투쟁을 하반기부터는 후원회원 조직과 현장 방문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나 역시 해직동료들과 함께 지역의 학교를 돌며 하루하루 정신없이 지냈다. 우리는 학교마다 <전교조신문> 등 홍보물을 나눠주며 상황을 공유했다. 생계대책위원회가 제작한 참교육 기념품을 판매하며 학교별로 후원회를 결성했다. 사실 기념품의 품질은 썩 좋지 않았지만 동료교사들과 시민단체 회원들, 학생들은 괘념치 않고 기꺼이 사주었다. 현장 조합원과 동료교사들의 후원은 비합법 상태로도 전교조가 실질적인 교원결사체로 뿌리를 내리는 데 큰 힘이 됐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희생도 컸다. 90년 2월19일 27살의 해직교사 배주영(경북 청송 진보종고) 선생님이 자취방에서 연탄가스 중독으로 숨졌다는 비보는 특히나 가슴 아팠다.
“우리에겐 선생님이 신앙이고 하늘이었습니다. 괴롭고 아파서 찾아가면 그냥 얼굴만 대해도 푸근했고 편안했습니다. 우리가 학교에 오는 즐거움은 국어시간에 선생님을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은 남과 더불어 사는 것이지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던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언제나 미소 띤 그 모습에 학교 안 오고 화투판 벌인 친구도 고개 숙이고 자퇴서 쓴다던 친구도 지금은 어엿한 사회인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모두들 잘하고 있는데 왜 당신만이 혼자 외로이 가셨습니까?”
2월23일 첫 전교조장으로 치러진 빗속의 장례식에서 제자들이 영전에 바친 추모사는 그대로 참교육 실천의 본보기였다.
전 전교조 위원장(구술정리 이경희)
후원회원 확보가 가능했던 주요 이유는 해직교사들의 학교현장 방문 효과였다. 징계저지 투쟁의 하나로 진행했던 출근투쟁을 하반기부터는 후원회원 조직과 현장 방문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나 역시 해직동료들과 함께 지역의 학교를 돌며 하루하루 정신없이 지냈다. 우리는 학교마다 <전교조신문> 등 홍보물을 나눠주며 상황을 공유했다. 생계대책위원회가 제작한 참교육 기념품을 판매하며 학교별로 후원회를 결성했다. 사실 기념품의 품질은 썩 좋지 않았지만 동료교사들과 시민단체 회원들, 학생들은 괘념치 않고 기꺼이 사주었다. 현장 조합원과 동료교사들의 후원은 비합법 상태로도 전교조가 실질적인 교원결사체로 뿌리를 내리는 데 큰 힘이 됐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희생도 컸다. 90년 2월19일 27살의 해직교사 배주영(경북 청송 진보종고) 선생님이 자취방에서 연탄가스 중독으로 숨졌다는 비보는 특히나 가슴 아팠다.
정해숙 전 전교조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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