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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길을찾아서] 남편 죽음에도 ‘전교조 탈퇴’ 거부한 김정희 선생 / 정해숙

등록 2011-08-08 19:53수정 2011-08-09 15:16

전남대 재학 때부터 광주지역 민주화운동을 주도하다 88년 5월 고문 후유증으로 숨진 신영일 열사가 1978년 들불야학 1기 형제들과 함께 했다. 그의 부인 김정희씨도 89년 전교조 해직교사로 필자와 함께 광주국공립중등지회에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사진 들불야학기념사업회 제공
전남대 재학 때부터 광주지역 민주화운동을 주도하다 88년 5월 고문 후유증으로 숨진 신영일 열사가 1978년 들불야학 1기 형제들과 함께 했다. 그의 부인 김정희씨도 89년 전교조 해직교사로 필자와 함께 광주국공립중등지회에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사진 들불야학기념사업회 제공
정해숙-아름다운 선생님의 멘토 61
 1989년 11월27일 전교조 광주국공립중등지회가 결성되었다. 교사 14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조선대 강의실에서 열린 결성식에서 나는 지회장으로 뽑혔다. 이미 6월에 전국 14개 지부별로 지회가 구성되었는데 광주의 6개 지회는 조금 뒤늦은 셈이었다.

 지회를 맡고 보니 당장 실무진 구성과 사무실 마련을 해야 했다. 다행히 현직 조합원인 체육과의 최병량 선생님이 ‘임대료를 마련해볼 테니 어디든 구하라’고 선뜻 지원을 약속해줘 맘놓고 나설 수 있었다. 금남로 일대를 둘러보는 길에서 임추섭 선생님을 만났는데 함께 있던 남풍출판사 정진백 사장을 소개해주었다. 정 사장은 전남출판협회 회장이기도 했다. 알고 보니 88년 미국 연수 때 구입한 전대협의 통일운동 책 <우리는 결코 둘일 수 없다>를 발간한 출판사였다.

 정 사장은 <우리는…>이 금서로 묶이는 바람에 3000부의 책도 회수당하고 안기부에 끌려가 조사까지 받고 나온 뒤였다. 우연히도 출판사는 우리가 구한 지회 사무실과 같은 건물에 있었다. 마침 출판사를 정리하는 중이라며 그는 제법 좋은 책상과 책장, 응접세트 등 모든 집기를 넘겨주었다. 덕분에 우리 지회는 버젓한 사무실을 갖췄고 전국의 전교조 사무실 중에서 처음으로 엘리베이터도 타고 다니는 호사를 누렸다. 전교조 광주지부도 많은 분들의 도움 덕택으로 시내에 제법 근사한 사무실을 마련할 수 있었다. 위치가 편리해 사무실은 현직 조합원들로 매일같이 북적였다.

 우리 지회에는 나를 포함해 해직교사 9명이 근무했다. 장휘국 현 광주교육감이 사무국장을 맡았고, 김정희 선생도 상근했다. 특히 김 선생은 80년 광주의 아픔을 다 씻기도 전에 또 해직의 고통을 겪고 있었다. 내가 김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86년 ‘교육민주화 선언’ 준비모임에서였다. 그때 둘째아이를 임신하고 있던 김 선생은 작은 체구에 차분한 인상이 좋았다. 그의 남편은 1978년 들불야학 창립을 주도하고 80년 오월항쟁 때 옥중에서 박관현 열사와 함께 40일간 단식투쟁을 했던 신영일 열사였는데, 그때 밀폐된 독방에서 온갖 고문에 시달린 후유증으로 88년 5월 끝내 숨지고 말았다. 신 열사는 86년 민주헌법쟁취 투쟁의 전국화를 위해서도 적극 활동했었다. 장기표(전태일재단 이사장)씨의 말에 의하면 “5·3 인천시위 때 어떤 청년이 나무 위에 올라가 핸드마이크를 들고 일장연설을 해 우왕좌왕하던 대규모 시위대를 집중시켰는데 알고 보니 신영일 열사였다”고 한다.

 신 열사가 별세하기 직전 광주 기독교병원 응급실 복도에서의 상황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 퇴근 뒤 병문안을 갔는데, 응급실 입구만 해도 아무도 없는 듯 조용하더니 복도에 들어서니 청년 지지자들이 가득 메우고 있어 깜짝 놀랄 정도였다. 그들은 약속처럼 침묵의 기원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둘러 응급실 안으로 들어가니 신 동지의 몸은 이미 하얀 홑이불로 덮여 있었다. 사망선고 직전이었다. 침대로 다가가 이불 밖으로 나와 있는 팔과 다리를 보니 거무죽죽한 게 뭐라 표현할 수 없이 처참했다. 요오드를 발라놓은 듯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다시 복도로 나왔을 때 너무 기가 막혀 그저 천장만 쳐다보며 눈물을 삼키고 있던 청년들의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눈물이 나오려 한다. 신 열사는 그렇게 어린 두 아들을 남기고 떠났고, ‘애국청년 고 신영일 열사 민주시민장’으로 치러진 장례 행렬은 도청 앞 노제와 모교인 광주일고·전남대를 거쳐 망월동으로 향했다. 내 기억으로 5·18 이후 처음으로 허락된 장례 행진이었다.

정해숙 전 전교조위원장
정해숙 전 전교조위원장
 그런 김 선생마저 해직될 상황이 됐을 때 주위의 모든 선생님들은 말려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누구도 감히 ‘탈퇴’를 권할 수 없었다. 광주지부에서 두번째로 김 선생의 징계위원회가 열리던 날 한 선생님이 대표로 내게 와서 탈퇴를 권해 달라고 부탁했다. 나 역시 마음은 몹시 무거웠지만 교육위원회로 가서 미리 김 선생을 만났다. “내가 하는 말은 나만의 생각이 아니고 모든 선생님들의 뜻이야. 나는 그저 전달할 뿐이야. 여러 가지 상황으로 보아 김정희 선생은 탈퇴서를 내는 게 좋겠어.” 그는 내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그러면 누구보다 애들 아빠가 무척 원망할 거예요”라며 단호하게 거부했다. 나는 애들도 생각하라며 다시 한번 권했지만 김 선생은 뿌리친 채 홀홀히 징계위원회장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모습이 오히려 더 가슴 아팠다.

 맏아들을 잃은 시부모의 아픔까지 감싸 안으며 꿋꿋하고 살뜰하게 지회 살림을 챙기던 김 선생은 결국 몇 달 뒤 “생계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해야겠다”며 상근 자리를 물러났다. 하지만 그는 이후에도 회의나 행사에는 꼬박꼬박 참석해 힘을 보탰다. 전국의 모든 해직교사들이 저마다 아픈 사연을 간직하며 그렇게 어려운 고비를 넘던 시절이었다.


전 전교조위원장(구술정리 이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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