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삶 평화시장 뒤로하고 고 이소선씨의 영정을 든 박계현 전태일재단 사무총장과 권영길 민주노동당 원내대표(앞줄 왼쪽) 등 추모객들이 5일 저녁 ‘어머니의 길 걷기’ 행사가 열린 서울 청계천 전태일 다리에서 손에 촛불을 들고 걸으며 고인을 기리고 있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이소선씨 온기 남아있는 길’ 촛불 들고 따라 걷다
장례위 ‘어머니의 길 걷기’
‘전태일 다리’부터
유가협 사무실까지
평생 간직했던 꿈 오롯이
장례위 ‘어머니의 길 걷기’
‘전태일 다리’부터
유가협 사무실까지
평생 간직했던 꿈 오롯이
고 이소선씨가 이따금 마음이 답답할 때 찾아 흉상이 된 아들을 쓰다듬고 마음을 다잡았다는 서울 청계천로 전태일 다리. 5일 저녁 7시, 그 다리에 전태일과 그의 어머니 이소선씨를 기억하는 이들 300여명(경찰 추산 200여명)이 촛불을 들고 모였다.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 민주사회장 장례위원회가 주최한 ‘어머니의 길 걷기’ 행사에서 시민들은 고인의 숨결이 닿아 있던 곳들을 두루 살피며 고인의 넋을 기렸다.
전태일 다리에서 고개를 들어 평화시장을 올려다보면 아들을 잃은 고인이 젊은 시절을 바쳤던 청계피복노조 사무실과 노동교실이 있던 자리가 눈에 들어온다. 고인은 시장에서 헌 옷을 팔아 번 돈으로 먼지 쌓인 밥을 먹으며 일했던 시다들을 위해 국수를 삶아 주고 공부를 가르쳤다. 전태일 흉상 옆에 선 청계피복노조 조합원 신순애(58)씨는 “전태일과 이소선 어머니를 만나 ‘나의 권리는 내가 찾아야 한다’는 그 가르침을 얻고 세상 앞에 떳떳하게 살 수 있었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어머니의 길 걷기’ 행사 참가자들은 아직 고인의 온기가 남아 있는 듯한 촛불을 들고, 고인이 올봄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몸을 뉘었던 종로구 창신동의 8평짜리 소박한 전셋집을 찾았다. 평소 이씨가 정성들여 가꾸던 화분 10여개가 주인 없는 방을 지켰다. 방에는 연두색 천 이불이 깔린 침대와 장롱, 텔레비전 등 꼭 필요한 것들만 있었다. 전태일 열사가 아이였을 때 찍은 가족사진과 장성한 딸 전순옥(57)씨와 찍은 사진에는 세월의 간격이 드러났다. 고인의 손때 묻은 전화번호부 수첩에 적힌 이름과 숫자의 글씨체는 모두 달랐다. 송기역 전태일재단 기획실장은 “사람을 유독 좋했던 어머니는 찾아오는 분들에게 전화번호를 적게 하고, 시간 나실 때면 그 번호로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곤 하셨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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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을 든 이들은 종로구 창신동의 ‘한울삶’도 찾았다.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 사무실인 한울삶은 이씨가 자식을 가슴에 묻은 부모들과 거의 평생을 함께해온 곳이다. 고인과 20여년을 함께해온 배은심(71) 유가협 회장은 “태일이 어머니가 우리 자식들의 영정을 든 채로 언제 쫓겨날지 모른다며 집을 사야 한다고 말해 자리를 잡은 곳이 한울삶”이라며 “곳곳에 어머니의 흔적이 묻어 있어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행사에 참여한 백발의 미국인 오기백(60) 신부는 “80년대 부천에서 노동운동을 할 때부터 고인을 존경해왔다”며 “노동자들을 위해 죽을 때까지 평생토록 헌신하신 고인의 모습을 통해 제2의 예수를 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만화 전태일>에서 전태일 열사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쳤던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었다”는 초등학생 육청호(12)군도 아버지의 손을 잡고 ‘어머니의 길’을 함께 걸었다.
참가자들은 유가협 어머니 아버지들의 따뜻한 환대를 받은 뒤 대학로를 거쳐 연건동 서울대병원 빈소에 도착해 조문을 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행사를 마쳤다.
이승준 박태우 기자 gam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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