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12월16일 ‘신한국당의 개악 노동법·안기부법 날치기 통과’를 저지하고자 권영길 위원장을 비롯한 민주노총 지도부가 서울 명동성당에서 밤샘농성에 앞서 삭발 결의를 하고 있다. 당시 민주노총 부위원장이었던 필자도 삭발을 시도했으나 주위의 만류로 그만뒀다. <한겨레> 자료사진
정해숙-아름다운 선생님의 멘토 94
‘유엔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에 관한 위원회’(사회권 위원회)는 1995년 5월19일 한국 정부에 대해 ‘즉각적인 법 개정을 통한 교사와 공무원 및 기타 집단의 노조결성권과 파업권 보장’ 내용을 포함한 권고결의안을 채택했다. 아울러 한국의 교육제도에도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다. 그 권고 내용은 지금 다시 읽어봐도 여전히 우리 사회에 던지는 의미가 가볍지 않다. 유엔 사회권 규약과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자유권 규약)은 세계인권선언을 각국이 법으로 수용하도록 강제하고자 만들어진 것이다.
사회권 위원회가 지적한 내용은 이렇다. ‘한국 정부가 노동조합을 결성할 권리를 제한하는 것은 유엔사회권 규약(일명 인권 A규약)의 8조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방위산업 종사자에게도 적용하지 않는 금지조항을 교직 종사자에게 적용해 노동조합 결성을 막을 뚜렷한 이유가 없다. 마찬가지로, 파업권과 관련된 규제는 지나치게 제약적이어서 노동자들 행위의 합법성 여부를 판단하는 데 마치 당국만이 절대적인 재량권을 갖는 것으로 보인다. 교사들이 높이 존경받는 한국의 문화적 전통을 이해하지만 위원회는 한국 사회 중요한 부문의 종사자들이 자신이 선택한 노동조합에 속할 기본적 권리와 자유를 과도하게 제한하고 이를 옹호하고자 문화적 전통을 내세우는 것은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근거라고 판단한다.’
위원회는 또 한국의 교육제도에 대해 우려를 하고 있다고 적시했다. ‘단지 초등교육만이 무상으로 제공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경제력을 감안할 때 무상교육이 중등 및 상위의 교육부문으로까지 확대되는 것이 적절하다고 보인다. 또 위원회는 한국 정부 대표가 극도로 경쟁적인 입시요건 때문에 고등교육 기회의 공급이 부족하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고 구두로 인정한 사실에 주목한다.’
당시 유엔 사회권위원회를 참관한 김선수 변호사(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회장)의 참관기를 보면, 정부 보고서 심의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부각된 사안 역시 교원노조 문제였다. 사회권 위원들은 “교원노조를 인정하지 않는 것에 매우 놀랐다”, “교원노조를 결성했다는 이유로 교사직을 잃는다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김영삼 정부는 출범 초기 개혁적인 노동정책을 추진했다. 이인제 초대 노동부 장관은 노조의 정치활동과 복수노조 허용 등의 법개정을 검토했다. 또 전교조 해직교사와 해고노동자 복직 추진을 발표했다. 그러나 93년 현대그룹노동조합총연합(현총련)의 공동임투 사건을 계기로 강경책으로 돌아섰다. 이 장관이 물러나고, 노동법 개정 시도도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다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을 앞두고 있던 96년 국회의원 총선 직후 노동정책이 또 한번 바뀌었다.
정부는 4월24일 ‘신노사관계 구상’을 발표하고, 이를 바탕으로 5월9일 대통령 직속기구인 ‘노사관계개혁위원회’(노개위)를 설치했다.
노개위에서 논의한 노동법 개정의 쟁점은 크게 2가지였다. 정부와 자본 쪽에서는 변형근로제·정리해고제·파견근로제 도입을 주장했고, 노동계는 이에 반대함과 아울러 복수노조·제3자개입 금지조항 철폐, 교사와 공무원의 노동3권 허용 등을 주장했다. 논의 초기에는 노동계의 의견이 긍정적으로 반영되는 듯도 했으나 구체적인 법안 심의 과정에서 결국 후퇴하고 말았다. 교원 노동기본권과 관련해서는 ‘노동조합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 별도의 근로자 단체로 단결권을 허용하는 안’과 ‘현재 법을 유지하되 교육회(한국교총)를 복수화하는 안’이 제시됐다.
그러나 쟁점 접근이 되지 않자 민주노총은 노개위 탈퇴를 선언하고, 10월4~10일 ‘노동법 개정 승리를 위한 철야농성’에 들어갔다. 하지만 12월16일 새벽 6시 여당인 신한국당은 ‘개악 노동법·안기부법’을 날치기 통과시켜버렸다. 권영길 위원장을 비롯한 민주노총 지도부는 즉각 명동성당에서 밤샘농성에 돌입했다. 이때 지도부는 전원 삭발을 하기로 결의했지만 부위원장 가운데 한명인 나는 예외로 결정했다. 나이 많은 여성이라는 점과 전교조 이미지 등을 고려해야 한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나 나는 혼자만 빠지는 것이 마뜩잖았다. 무거운 마음으로 삭발식이 예정된 명동성당 앞 농성장으로 가는데, 박상대 사무차장이 줄곧 동행하며 삭발을 하지 말라고 요청했다.
이윽고 첫번째 5명의 삭발에 이어 나는 두번째 줄에 끼어 삭발 의자에 앉았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발기가 고장이 났다. 기다리는 사이 옆에 서 있던 이영희 당시 현총련 의장이 ‘삭발을 안 하는 게 좋겠다’며 말렸다. “위원장님에 대해 국민들이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는데 전교조 합법화를 앞두고 있는 시점에 삭발을 하시면 부정적인 영향을 줄 것 같습니다.” 나는 진정성과 동지애가 느껴지는 그의 조언을 듣고 순간 생각을 했다. “여러 동지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내 자존심만 내세울 수는 없겠구나.” 결국 삭발을 포기하고 돌아오는 내내 마음이 무거워 말없이 걸었더니 박 사무차장도 묵묵히 뒤따랐다. ‘왜 하필 그 순간 이발기가 고장났을꼬, 인연이란 참 묘하다.’
정해숙 전 전교조 위원장(구술정리 이경희)
정해숙 전 전교조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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