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오후, 광주 인화학교 사건 해결과 사회복지사업법 개정을 위한 시민문화제 ‘분노의 도가니를 환희의 도가니로’가 열린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참가자들이 초대가수 강허달림의 노래공연을 보고 있다. 이날 노래공연과 이야기 손님의 대화 내용 등 모든 프로그램은 청각장애인들을 위해 자막으로도 보여졌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도가니’ 자막제공 22곳뿐
보고도 정작 내용은 잘 몰라
“수화 장면만 기다렸어요”
보고도 정작 내용은 잘 몰라
“수화 장면만 기다렸어요”
청각장애를 갖고 태어난 함효숙(41)씨는 지난달 말 영화 <도가니>를 보러 극장을 찾았지만 결국 자막 없는 영화를 봤다. 자막 상영관이 있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고, 하루 1~2회 상영하는 시간표에 맞춰 갈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영화 보는 내내 수화 나오는 장면만 기다렸다”고 했다. 수화로 이야기하던 그의 손짓이 빨라졌다. “재판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너무 궁금했어요. 수화통역사가 나오는 장면도 자주 끊기고 잘 안 보여 답답했죠.”
함씨를 비롯해 지난 11일 서울 송파구 장지동 ‘장애인정보문화누리’ 사무실에서 만난 다른 청각장애인들도 자막 없이 상영된 <도가니>를 봤다고 했다. 김세식(55)씨는 “청각장애인을 위해 만든 영화인데 자막 없는 영화를 보려니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었다”고 말했다.
최근 400만 관객을 넘어서며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도가니>는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다. 제작사의 노력으로 12일 현재 전국 상영관 640곳 가운데 22곳에서 자막을 넣은 <도가니>를 상영하고 있고, 상영관 수나 상영 횟수도 늘어날 예정이다. 하지만 지난해 제작된 한국영화 152편 가운데 한글 자막을 제공한 영화는 8편에 그쳤다. 이호준 한국농아인협회 영화사업 담당자는 “<도가니>에 대한 관심에서 끝날 게 아니라 한국에 살지만 한국영화를 볼 수 없는 청각장애인들의 현실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영화 자막 입히기 작업
제작사쪽 작품유출 꺼리고
상영관은 비용 탓 미적미적
한국농아인협회는 2005년부터 영화진흥위원회와 함께 ‘한국영화 한글자막화면해설사업’을 진행해 왔다. 해마다 한국영화 15편에 자막을 넣어 전국 22개 극장에서 상영했다. 11월에는 상영관이 4개 더 늘어나게 된다. 하지만 이씨는 “장비 비용과 영화 사전 유출을 우려하는 제작사들의 소극적인 태도 때문에 사업 확대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22개 상영관은 청각장애인을 위한 자동자막기(자막 작업본을 영사기 서버에 입력하는 장치) 1대와 시각장애인을 위한 에프엠(FM) 보청기 1세트(6대)를 보유하고 있는데, 자동자막기 세트는 1대에 4000만원, 보청기 세트는 550만원이나 한다. 일반 영화관은 비용 때문에 구입을 꺼리는 상황이다. 최근 몇 년간 영화 필름이 개봉 전 인터넷에 유출되는 사건이 빈발해 자막을 넣을 작품을 섭외하기도 힘들어졌다.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장차법)이 제정됐지만 “영상물 제작업자 및 배급업자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동등하게 접근하고 이용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만 규정하고 있을 뿐이다. 김철환 장애인정보문화누리 활동가는 “그마저도 ‘300석 이상 상영관에 장애인 문화활동을 보조하는 시설과 인력을 갖춰야 한다’는 내용이 2015년에나 적용될 예정”이라고 지적했다. 장애인정보누리는 14일 국가인권위원회에 “장애인의 영화 접근권을 보장하라”는 진정서를 낼 계획이다. 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
제작사쪽 작품유출 꺼리고
상영관은 비용 탓 미적미적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