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원(44·사진)씨가
김해 봉하마을서 서울시청까지 걸어서 완주한 시각장애인 이강원씨
야구선수 시절 희귀병으로 시력상실
절망 떨쳐내고 안마기술사로 일어서
“집밖으로 나와서 부딪혀야 극복가능”
야구선수 시절 희귀병으로 시력상실
절망 떨쳐내고 안마기술사로 일어서
“집밖으로 나와서 부딪혀야 극복가능”
8일 오후 서울 한강대교 남쪽. 쌩하고 지나가는 차량 소음에 검은색 선글라스를 쓴 이강원(44·사진)씨가 몸을 움츠렸다. 대학 후배 김경규(43)씨가 “괜찮아 별거 아니야”라고 하자 그는 그제야 허리를 폈다. 흰색 등산용 지팡이가 이씨와 김씨 사이를 연결했다. 비장애인인 김씨가 지팡이를 당기자 이씨는 발걸음을 내딛으며 말했다. “시각장애인들에게 걷는 것은 공포에요. 휙휙 지나가는 차소리만 들려도 무서워요.”
이들은 지난달 20일 서울시청을 목표로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을 출발했다. 커다란 등산용 배낭을 메고 아침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날마다 20~25㎞를 걸었다. 낙동강을 건너고 10여개의 고개를 넘었다. 여관이 보이면 짐을 풀고 산이 나오면 텐트를 쳤다. 대전을 지나서 국도를 따라 걷고 걸어 이날 오전 경기도 안양시와 서울 경계에 도착했다. 이씨의 발바닥은 굳은 살로 딱딱했고 입안은 헐어 있었다.
19일 동안 400㎞ 넘는 거리를 걸어왔지만 이씨는 담담했다. “10년 전 시력을 잃은 뒤 자신감도 완전히 잃었는데, 이번에 그 공포를 깨보고 싶었어요. 이제야 자신감이 생기네요.”
25년 전 그는 프로야구 선수를 꿈꾸며 시속 140㎞의 공을 던지던 단국대 야구부 투수였다. 타자 앞에서 뚝 떨어지는 낙차가 큰 커브볼이 주무기였다. 하지만 군 전역을 앞둔 91년 여름 휘귀병인 ‘베체트병’에 걸렸다. 오른쪽 눈의 시력부터 떨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대학 3학년 때 야구공을 놓았다. 이씨는 “실명 한다는 이야기가 사형선고로 들렸다”며 “23살의 나이에 공부도 제대로 안한 운동선수가 살아갈 수 있을까 막막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체육학 전공을 살려 레저스포츠 강사로 일했지만 2002년 한일 월드컵이 시작될 즈음 두 눈의 시력을 모두 잃었다. “죽을 용기도 없었어요. 무서워서 집 밖에 나가지도 못했죠.” 4년 동안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던 야구중계 소리를 듣는 게 소일거리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던지던 커브볼과 달리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2006년 복지관에서 안마기술을 배워 안마사 자격증을 땄다. 지난해와 올해 전국장애인체육대회는 역도 +86㎏ 경기에 인천 대표로 출전했다. 이번 여정은 지난달 21일 경남 진주에서 막을 내린 전국체전에서 동메달을 따자마자 출발한 것이다.
그는 시력을 잃은 뒤 몰랐던 사실을 더 많이 알게 됐다고 했다. “특수학교에 가서 수많은 시각장애인 아이들을 만났는데, 이들이 나중에 커서 일할 때가 안마시술소 밖에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웠어요.” 이씨는 “지금 정치권에 박원순 서울시장, 안철수 서울대 교수 같은 분들이 새바람을 일으키는데 이런 분들이 우리 같은 사람들을 위한 정치를 펴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시각장애인들에게 당부의 말도 잊지 않았다. “우선 집 밖으로 나와 부딪혀 보세요. 스스로 나오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글·사진 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