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박종철 군의 아버지 박정기씨가 유가협 사무실 ‘한울삶’에서 아들을 비롯한 민주화운동 열사 120명의 영정사진 앞에 서 있다. 박 씨는 1987년 1월 아들이 고문사 당한 후 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김경애 기자
새 연재 시작하는 박정기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
87년 항쟁 거리에서 다시 태어나…“분노와 연대의 기록 다음 세대에 전할 것”
87년 항쟁 거리에서 다시 태어나…“분노와 연대의 기록 다음 세대에 전할 것”
한국 근현대사에서 잊을 수 없는 인물들의 생생한 회고록인 ‘길을 찾아서’의 11번째 이야기 ‘아들보다 두 살 많은 아버지’가 12월6일 화요일치부터 독자 여러분을 찾아간다. 주인공은 6월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던 고 박종철군의 아버지 박정기(84·유가협 고문)씨이다. 1987년 1월13일 서울대에 다니던 막내아들 박종철을 경찰의 고문으로 잃은 날, 아버지 박씨는 새로 태어났다. “나는 한 살이 되었고, 그로부터 25년째인 올해 스물다섯 살이다. 그해 철이는 스물세 살이었다. 이제 나는 철이보다 두 살 많은 애비가 되었다.” 그가 현재 고문(전 회장)을 맡고 있는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도 내년 25돌을 맞는다. “97년 이후 14년 만에 유가협에 새 식구가 생겼다. 용산참사 유가족들이다. 유가협에 새 회원이 생겼다는 것은 아직도 권력의 폭력으로 고통받는 구성원들이 많다는 걸 의미한다.” 내년은 6월항쟁 25돌이기도 하다. 그와 유가협의 이야기는 개인사를 넘어 현대사, 그리고 민주화의 역사인 셈이다. 집필은 구술사 전문 작가인 송기역씨가 맡는다.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 회원들이 모두 앓는 병이 있다. 불면증이다. 자식들이 떠난 지 이삼십년이 지났어도 불면증을 안고 산다.
언젠가 나는 이소선(전태일)과 배은심(이한열) 어머니가 수면제를 반으로 쪼개 나눠 먹는 것을 본 적이 있다. 한 알을 다 먹으면 너무 독해서란다. 세상에 수면제를 나눠 먹는 우정이 어디 있단 말인가?
나도 아들이 세상을 떠난 후 도저히 잠을 이루지 못해 약방에서 수면제를 사먹었다. 그런데 더 잠이 오지 않았다. 그 후론 수면제 대신 술로 밤을 지샜다. 종철이 엄마는 아직도 수면제를 먹고 있다. 애비의 마음으로 어찌 에미의 심정을 알 수 있겠는가? 다만 종철 엄마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로 헤아릴 뿐이다.
“죽지 못해 사는 기지.”
내 나이 이제 여든넷이다. 부산시 수도국에서 36년 만에 정년퇴임하던 해인 1987년, 나는 아들 박종철을 잃었다. 그땐 예순 살이었다. 올해 나는 또 한 명의 식구인 유가협의 이소선 어머니를 떠나보냈다. 나는 어머니에게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웠다. 그 배움 때문에 유가협의 회장을 맡을 수 있었다. 나는 회장을 하면서도 늘 어머니의 의견을 구했고 인생을 기대었다.
이제 와 삶을 돌이켜보니 회한이 없을 수 없다. 맨 먼저 떠오르는 건 내 아들 철이다. 철이는 아직 세상을 떠나지 않았다. 이소선 어머니도 배은심 어머니도, 전태일을 이한열을 떠나보낸 적이 없다고 말하곤 했다. 유가협 회원들도 다 그렇게 말했다.
나는 1987년부터 유가협에서 활동했다. 유가협 회원들은 분신해서 죽고, 투신해서 죽고, 음독으로 죽고, 고문으로 죽고, 의문사로 죽은 자식들을 끌어안고 사는 부모들이다. 이들은 지금도 꿈에 자식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꿈에서라도 보고 싶어서다.
87년 이전, 나는 사회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우리 또래들이 그렇듯 유교 교육을 받고 자랐다. 공무원 신분이었기 때문에 몸가짐이 더 조심스러웠다. 선거 때는 야당 후보들에게 투표했지만, 정치에 무관심했다. 내 가족의 평안함이 우선이었다. 열여덟에 어머니와 여동생을 동시에 잃은 뒤 가족에 대한 애착이 컸다. 그런데 철이가 경찰의 고문에 의해 죽었다. 그 일을 겪은 뒤 내가 본 세상은 전과 달랐다. 아들은 나에게 새로운 세상으로 건너가는 다리였다. 나는 고문 없는 세상을 위해 일평생을 바쳐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들의 죽음은 6월항쟁을 불러일으켰다. 종철이 추도식 때 거리에서 격렬한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때 시민들이 들고 있는 펼침막의 글귀들을 보고 나는 멍하니 그 자리에 멈춰섰다. 그중 하나는 임진강에서 철이의 유해를 뿌릴 때 내가 했던 말이다. “고문 없는 세상에 살고 싶다.” “철아, 잘 가그래이. 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대이.” 그때 아들이 간 길이 어떤 길인지 알 수 있었다. 나는 6월의 거리에 서서 하염없이 울었다. 나는 그날 늦깎이 투사로 다시 태어났다. 유가협의 어머니 아버지 들도 모두 늦깎이 투사였다. 유가협 사무실인 한울삶의 한쪽 벽엔 영정사진이 120장가량 걸려 있다. 이 사진들은 고스란히 현대사의 풍경이고, 민주화운동사의 풍경이다. 이 얼굴들, 이 죽음들이 있었기에 이만큼이나마 민주주의와 인권이 숨쉬는 세상을 만들었다는 것을 기억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는 올해 여러 차례에 걸쳐 ‘희망버스’를 타고 부산의 한진중공업으로 향했다. 처음 ‘희망버스’를 탔을 때는 제7회 박종철 인권상 상패를 김진숙씨에게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87년 박종철을 기억하며 전국에서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듯, 2011년 희망버스를 타고 시민들이 부산으로 몰려왔다. 김진숙씨를 크레인에서 내려오게 한 것은 그 물결이었다. 분노와 연대는 세상을 바꾼다. 내년은 6월항쟁 25돌이다. ‘길을 찾아서’를 통해 지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그 시절의 분노와 연대의 이야기를 다음 세대에게 들려주는 게 내 인생의 남은 몫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몇 명이 죽었고, 누가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 기록하지만, 나와 당신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가슴에 담았으면 한다. 나는 아직도 철이가 죽음과 맞바꾸면서까지 지키려 했던 진실이 무엇인지 생각하곤 한다. 그것은 한 인간의 사랑일 것이다. 그 사랑은 무엇일까? 스물세 살의 철이는 세상의 한가운데서 무엇을 꿈꾸었을까? 나는 그 답을 찾고 싶다. 내 삶이 다할 때까지. 구술정리 송기역
87년 이전, 나는 사회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우리 또래들이 그렇듯 유교 교육을 받고 자랐다. 공무원 신분이었기 때문에 몸가짐이 더 조심스러웠다. 선거 때는 야당 후보들에게 투표했지만, 정치에 무관심했다. 내 가족의 평안함이 우선이었다. 열여덟에 어머니와 여동생을 동시에 잃은 뒤 가족에 대한 애착이 컸다. 그런데 철이가 경찰의 고문에 의해 죽었다. 그 일을 겪은 뒤 내가 본 세상은 전과 달랐다. 아들은 나에게 새로운 세상으로 건너가는 다리였다. 나는 고문 없는 세상을 위해 일평생을 바쳐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들의 죽음은 6월항쟁을 불러일으켰다. 종철이 추도식 때 거리에서 격렬한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때 시민들이 들고 있는 펼침막의 글귀들을 보고 나는 멍하니 그 자리에 멈춰섰다. 그중 하나는 임진강에서 철이의 유해를 뿌릴 때 내가 했던 말이다. “고문 없는 세상에 살고 싶다.” “철아, 잘 가그래이. 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대이.” 그때 아들이 간 길이 어떤 길인지 알 수 있었다. 나는 6월의 거리에 서서 하염없이 울었다. 나는 그날 늦깎이 투사로 다시 태어났다. 유가협의 어머니 아버지 들도 모두 늦깎이 투사였다. 유가협 사무실인 한울삶의 한쪽 벽엔 영정사진이 120장가량 걸려 있다. 이 사진들은 고스란히 현대사의 풍경이고, 민주화운동사의 풍경이다. 이 얼굴들, 이 죽음들이 있었기에 이만큼이나마 민주주의와 인권이 숨쉬는 세상을 만들었다는 것을 기억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는 올해 여러 차례에 걸쳐 ‘희망버스’를 타고 부산의 한진중공업으로 향했다. 처음 ‘희망버스’를 탔을 때는 제7회 박종철 인권상 상패를 김진숙씨에게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87년 박종철을 기억하며 전국에서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듯, 2011년 희망버스를 타고 시민들이 부산으로 몰려왔다. 김진숙씨를 크레인에서 내려오게 한 것은 그 물결이었다. 분노와 연대는 세상을 바꾼다. 내년은 6월항쟁 25돌이다. ‘길을 찾아서’를 통해 지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그 시절의 분노와 연대의 이야기를 다음 세대에게 들려주는 게 내 인생의 남은 몫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몇 명이 죽었고, 누가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 기록하지만, 나와 당신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가슴에 담았으면 한다. 나는 아직도 철이가 죽음과 맞바꾸면서까지 지키려 했던 진실이 무엇인지 생각하곤 한다. 그것은 한 인간의 사랑일 것이다. 그 사랑은 무엇일까? 스물세 살의 철이는 세상의 한가운데서 무엇을 꿈꾸었을까? 나는 그 답을 찾고 싶다. 내 삶이 다할 때까지. 구술정리 송기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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