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3월 서울 영등포교도소에 수감중인 이부영(가운데) 당시 민통련 사무처장에게 ‘박종철군 고문 경관이 3명 더 있다’는 사실을 제보한 당시 보안계장 안유(왼쪽)씨와 그 사실을 적은 편지를 밖으로 전달한 교도관 한재동(오른쪽)씨가 지난 14일 열린 ‘박종철 열사 25주기 추도식’에서 처음 신분을 공개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박정기-아들보다 두 살 많은 아버지 38
1987년 3월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사무처장 이부영은 서울 영등포교도소에 수감중이었다. 86년 이른바 ‘5·3 인천사태’ 배후주동 혐의로 구속돼 재판을 받고 있었다. 그는 어느날 보안계장 안유를 통해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의 전모를 파악했다.
안유는 대공분실 간부들과 이미 1월 경찰 자체 수사에서 주범으로 꼽혀 구속된 고문경관 조한경과 강진규의 면회 장면을 옆에서 지켜봤다. 애초 경찰 간부들은 교도관에게 자신들의 면회에 참관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규정상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교도소 쪽에서 거부하자 그들은 참관은 하더라도 중견 간부가 입회할 것과 면회 내용을 기록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교도소에서 이를 받아들여 안유가 참관하게 된 것이었다.
그는 이때까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거의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 경찰들의 대화 속에서 치안본부가 사건을 은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남영동 대공분실 간부들은 고문 경관들에게 1억원이 찍힌 통장을 보여주며 회유하고 협박했다. 실제 고문 수사관이 3명 더 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안유는 공안사범 전담반의 반장이었다. 공안사범을 감시하고 교화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그런 그가 보기에도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기가 막혔죠. 해도 해도 너무하잖아요. 이놈들이 별짓을 다 하는구나 싶었습니다.”
그가 이부영에게 이 사실을 알리게 된 데는 그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동아투위 해직기자 출신이기도 한 이부영은 교도소 안에서 재소자의 대변자 구실을 하고 있었다.
당시 교도소는 조용한 날이 없었다. 감방이 모자랄 만큼 재소자들이 가득했고, 이들은 거의 매일 구호를 외치고 교도관들과 다투었다. 그때마다 일반 재소자들도 시국사범들의 목소리에 힘을 보탰다. 교도관과 재소자들의 상명하복 관계는 학생 수감자가 많아지면서 바뀌었다.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안유와 이부영이 교도소와 재소자의 대표로 협상했다. 안유는 이전에 근무했던 서울구치소(서대문형무소)에서부터 이부영을 알고 있었다. 마침 한 고교 동창이 이부영과 군대 동기여서 안유에게 부탁했다.
“부영이형 잘 돌봐줘야 돼.”
안유는 넌지시 이부영에게 조한경과 강진규에게 어떤 사연이 있음을 내비쳤다. “이부영씨가 기자 출신이라 나중에라도 기록으로 남겨주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얘길 했어요.” 그는 자신의 얘기가 밖으로 나갈 것이라곤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며칠 뒤 이부영이 그에게 말했다. “안형. 면회 기록을 모두 없애야 하네.” 그 말을 듣는 순간 절로 표정이 굳었다. 대화 내용을 기록하지 않았지만 면회자 등을 기록한 업무일지까지 모두 삭제하라는 조언이었다. 그날 바로 업무일지에서 관련된 내용을 삭제했다. 안유는 이부영이 무슨 일을 벌였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은폐 조작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기까지 두 달 가까이 걸렸다. 그때까지 불안에 시달렸다. 박봉의 교정 공무원으로 세 아이를 길러야 하는 처지에서 다가올 일이 두려웠다. 다행히 염려하던 일은 없었다. “경찰에선 가족들을 통해 정보가 사제단에 전달된 걸로 판단한 것 같아요. 편지가 밖으로 나간 뒤 바로 고문 수사관들이 의정부교도소로 이감된 것도 다행스런 일이었죠.” 안유는 5월18일 김승훈의 폭로 이후에야 사건의 파장을 실감했다. 그는 이후 6월항쟁 내내 교도관 신분으로 시위에 참여할 순 없었지만 마음속으로 시위대를 응원했다. “그렇게 큰 사건인 줄 몰랐어요. 그토록 빨리 역사가 바뀔 줄 몰랐습니다. 역사의 물줄기가 아주 작은 것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깨달았죠.” 안유는 지난 14일 박종철 25주기 추도식에서 한재동 교도관과 함께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한재동은 당시 이부영의 편지를 밖으로 전해준 전령이다. 안유는 지금껏 추도식 자리에 나서기 부끄러웠다고 말했다.
“나는 학생과 민주화 인사들을 탄압한 사람 중 하납니다. 그러면서도 늘 미안했어요. 특히 학생들은 나라를 이끌어갈 동량인데 수갑을 채우고 포승줄로 묶었습니다. 그때마다 참 불편했어요. 그래서 때론 수감자들에게 공격당하고 그들이 던진 짬밥통에 얻어맞으면서도 한 번도 징벌한 적이 없어요. 나는 본의 아니게 가해자의 편, 탄압자의 편이었고, 전두환의 주구, 사냥개였단 말이에요. 그게 미안했기 때문에 추도식에 참여하는 일이 조심스러웠습니다.”
얼마 전 그는 교도관으로 함께 일했던 동료들의 전화를 받았다. 한 동료가 안유와 비슷한 연배의 퇴직 선배들 분위기를 전해주었다. 선배들은 신문에 보도된 그의 추도식 참석 기사를 읽고 욕설을 내뱉었다고 한다.
“우리 후배들은 ‘그 엄혹한 시절에 어떻게 그런 용기를 냈냐’고 칭찬해요. 그런데 올드보이들은 ‘빨갱이들 모인 자리에 왜 찾아가냐’며 욕했다고 해요.”
박정기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구술작가 송기역
안유는 넌지시 이부영에게 조한경과 강진규에게 어떤 사연이 있음을 내비쳤다. “이부영씨가 기자 출신이라 나중에라도 기록으로 남겨주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얘길 했어요.” 그는 자신의 얘기가 밖으로 나갈 것이라곤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며칠 뒤 이부영이 그에게 말했다. “안형. 면회 기록을 모두 없애야 하네.” 그 말을 듣는 순간 절로 표정이 굳었다. 대화 내용을 기록하지 않았지만 면회자 등을 기록한 업무일지까지 모두 삭제하라는 조언이었다. 그날 바로 업무일지에서 관련된 내용을 삭제했다. 안유는 이부영이 무슨 일을 벌였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은폐 조작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기까지 두 달 가까이 걸렸다. 그때까지 불안에 시달렸다. 박봉의 교정 공무원으로 세 아이를 길러야 하는 처지에서 다가올 일이 두려웠다. 다행히 염려하던 일은 없었다. “경찰에선 가족들을 통해 정보가 사제단에 전달된 걸로 판단한 것 같아요. 편지가 밖으로 나간 뒤 바로 고문 수사관들이 의정부교도소로 이감된 것도 다행스런 일이었죠.” 안유는 5월18일 김승훈의 폭로 이후에야 사건의 파장을 실감했다. 그는 이후 6월항쟁 내내 교도관 신분으로 시위에 참여할 순 없었지만 마음속으로 시위대를 응원했다. “그렇게 큰 사건인 줄 몰랐어요. 그토록 빨리 역사가 바뀔 줄 몰랐습니다. 역사의 물줄기가 아주 작은 것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깨달았죠.” 안유는 지난 14일 박종철 25주기 추도식에서 한재동 교도관과 함께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한재동은 당시 이부영의 편지를 밖으로 전해준 전령이다. 안유는 지금껏 추도식 자리에 나서기 부끄러웠다고 말했다.
박정기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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