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인 자활을 돕기 위해 경기도 양평에 연 서울시립 ‘서울영농학교’에서 지난 20일 오후 노숙인들이 땅콩밭에서 풀을 뽑고 있다. 양평/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서울영농학교 1기생 노숙인들
부지런한 농군의 손길에도 잡초는 질기게 돋아난다. 김매고 돌아선 지 보름 만에 990㎡(300평) 땅콩밭이 온통 잡초투성이다.
20일, 크지 않은 밭뙈기 이곳저곳에 쭈그려 앉은 스무명의 사내들은 초여름 땡볕도 아랑곳없이 김매기에 한창이었다. 여린 땅콩 줄기가 다칠까 한손으로 감싸고 잡초를 걷어내는 손길이 살뜰했다. 호미를 든 손놀림이 거칠어도, 이들은 모두 3개월차 농부다. 경기도 양평에 자리잡은 서울시립 ‘서울영농학교’에서 새 삶을 시작한 노숙인들이다.
정수남(가명·60)씨도 거리의 삶을 접고 이곳에서 농부의 삶을 시작했다. 3년 전 부산에서 상경했지만, 인력사무소에 나가봐도 예순 가까운 이를 써주는 일자리가 없었다. 쪽방·고시원·찜질방을 전전하다 노숙을 시작했다.
젊어서는 중장비 기사로 사우디아라비아에 가 당시 공무원 월급의 8~9배에 이르는 큰돈을 벌기도 했다. 고향인 부산에 돌아와 집도 사고 결혼도 했다. 남부럽지 않던 정씨에게 13살 딸의 백혈병과 함께 불행이 찾아왔다. 8년의 병수발 끝에 2005년 딸을 잃고 억대 빚만 남았다. 월급을 압류당하기 시작하자 회사에 명예퇴직을 신청하고 아내와도 이혼했다.
“아무 하는 일이 없으니까 자꾸 술하고만 친해집디다.” 사우디에서 거친 현장일을 할 때도 술을 즐기지 않았던 정씨다. 가족도, 친구도 없는 떠돌이 생활 중엔 손에서 술병을 놓은 날이 없었다. 거의 날마다 소주 2~3병씩을 들이켰다. “떠돌아다니니 우울증 비슷한 게 생기데요. 고독도 참기 어렵고.”
알코올중독·폭력 굴레 벗어나
합숙하며 농업의 매력에 흠뻑
밭작물 재배에 양봉·양계까지
함께 일하며 대인관계도 회복 시, 7개월 교육뒤 일자리 알선
“동료와 어울려 농사짓고 싶어” 정씨는 서울 영등포 노숙인 쉼터 ‘보현의 집’에서 지내던 지난 3월 서울영농학교 소식을 들었다. 서울시가 운영하는 영농학교에서 7개월의 교육과정을 이수하면 농업 계통으로 취업을 알선하거나 농지 임대를 통해 공동농장을 꾸릴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내용이었다. 정씨와 비슷한 과거를 속에 품은 노숙인 40여명이 영농학교를 찾아왔다. 영농학교 1기생인 이들은 지난 4월 입학해 합숙생활을 하며 전문강사로부터 농업의 이론과 실기를 배우고 있다. 땅콩·감자·옥수수·수박·파프리카 등 다양한 작물을 1만6000여㎡(5000여평) 밭에서 직접 재배한다. 양봉·양계도 함께 배우고 있다. 가난, 알코올중독, 폭력, 질병 등을 끼고 사는 노숙인들에게 농업은 새로운 길을 보여주고 있다. 대다수 노숙인이 구할 수 있는 일거리래야 날품을 파는 임시직이고, 그나마도 안정적이지 않다. 반면 농사는 지속가능하다. 영농학교의 최종혁 사무국장은 “많은 노숙인들은 거리생활로 체력이 약해진데다 당장 홀로서기가 어려워 일자리가 생겨도 오래 지속하기 어렵다”며 “여럿이 어울려 농사를 지으면서 사회적 관계도 회복하고 어딘가에 ‘참여’한다는 자신감도 키우고 있다”고 말했다. 환갑을 앞둔 나이의 정씨는 이제야 자신의 체질에 농사가 맞춤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쑥쑥 솟는 옥수수 줄기를 보는 일도, 작업하며 동료들과 실없는 농담을 나누는 일도 즐겁다. 서울시가 약속대로 귀농 여건을 마련해주면 동료들과 어울려 농사를 짓는 게 꿈이다. 양평에 내려온 뒤엔 술 한잔도 입에 대지 않았다. “다음날 공부하려면 술을 못 마십니다. 농사가 이게 보통일이 아닙디다. 그래도 아주 재밌습니다. 밥맛이 당긴다니까요.” 정씨가 상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가뭄 속에 피어난 땅콩꽃이 노랗게 빛났다.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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