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심정] 정연 수녀와 준식 수사의 용서와 벌
용서
오늘은 6학년 종교수업이 있는 날, 내가 가장 힘들어 하는 수요일이다. 위로 무서울 것 없고, 거칠 것 없는 천하무적 아이들에게 그야말로 그들 관심 밖의 나의 종교수업은 1:100의 고달픈 싸움이다. 아이들의 관심 유도를 위해 게임을 시도했다가는 되레 그 흥분의 도가니를 감당하기 힘들고, 심성프로그램으로 접근했다간 제 각각 수업이 되기 쉬워 위험하다. 늘 나의 수업시간마다 애를 먹이는 재석이 녀석과의 만남을 생각하며 먼저 성당에 들러 흔들리는 마음을 부여잡는다.
“주님, 오늘은 제가 아이들에게 지지 않고 이기는 하루가 되게 해 주십시오.”
그럼에도 학교로 향하는 나의 발걸음도 마음도 영 확신이 서지 않는다. 드디어 대망의 첫 종교 수업 시간!
“자, 사랑하는 친구들! 오늘은 우리 선조들이 종교 박해시대 때에 어떤 신념으로 살아갔는지 알아보고,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우리 친구들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는지 이야기를 나누어보기로 해요. 피곤한 친구들은 조용히 엎드려 쉬는 것은 좋지만 수업을 하고 싶은 친구들이나, 수업을 진행하는 수녀님에게 방해가 되는 행동은 안 됩니다. 약속할 수 있지요?”
위로 번쩍 손을 들어 올림과 동시에 재석이 녀석, 자기 하고 싶은 말을 끝낸다.
“진짜, 엎드려서 자도 돼요?”
“그럼요. 양심껏 쉬는 것을 가지고 수녀님은 뭐라고 하지 않겠어요. 단, 자기의 자유나 권리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권리도 생각해주는 성숙한 행동이 필요해요. 수녀님은 수업할 권리를 침해받고 싶지 않아요. 알겠죠?”
“네.”
‘오우, 오늘은 대답이 순수하게 잘 나오네. 그래, 제발 내 말만 끊지 말아다오.’
하지만 이런 희열의 기쁨을 맛도 보기 전에 벌써 슬슬 가동하는 재석이의 행동거지가 나의 시야에 포착되기 시작한다. 그렇게 다짐하고 약속을 했건만 재석이는 엎드린 지 일 분도 되지 않아 옆 친구의 필통을 숨기더니, 앞자리 친구의 책에 기습적으로 낙서까지 해 버린다. 나는 녀석에게 걸려들지 않으려 애써 못 본 척,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리며 목소리를 높여가며 겉으로는 순조롭게 수업을 진행하고 있으나 속에서는 부글부글,
‘그럼 그렇지. 너를 믿은 내가 바보지. 에고 내 팔자야.’
점점 행동반경이 커지는 재석이 때문에 내 혈압은 올라가고 이마엔 내 천 자 주름이 잡힌다. 다음은 눈꼬리가 올라가기 시작하며 머리 뚜껑이 열리기 직전에 나는 탁 누르고
“재석아! 수업 전에 수녀님하고 한 약속 벌써 잊었니? 수업에 참여하려면 제대로 하고 쉬려면 아예 쉬라고 했는데?”
“알았어요. 쉬면되잖아요.”
그러나 어쩜 그렇게 내 말이 끝나고 일 분을 못 견디는지?또다시 꼬물꼬물 거리는 재석이의 행동에 나의 반응도 더욱 빨라진다.
“오늘 이상하게 약속을 안 지키는 친구가 있네. 왜 그럴까? 어떻게 도와줘야 할까?”
“잰 그냥 놔둬야 해요. 말해도 소용없어요. 원래 그렇거든요.”
애어른 민수가 나를 달랜다.
“원래 그런 게 어디 있니! 솔직히 수녀님은 이렇게 산만한 분위기에선 너희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다 도망가 버리거든? 재석아, 잘 생각해보고 선택해라.”
“알았어요. 진짜로 조용히 수업할게요. 약속해요.”
“그래, 정말 약속했다. 수녀님은 널 믿어!”
하지만 역시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건 정답. 3분을 못 넘기는 재석이의 행동에 오늘도 난 폭발하고 만다.
“이재석! 안되겠다. 넌 지금 수녀님의 수업할 권리와 친구들의 수업 권리를 빼앗고 있거든? 너에게 주어진 기회를 네가 스스로 포기했으니 할 수 없다. 뒤로 나가!”
“진짜, 마지막이에요. 한 번만 더!”
“안돼! 그리고 수업 끝나고 남아!”
책상을 붙잡고 뭉개는 재석이를 최대한 무표정과 침묵으로 뚫어져라 응시하니 할 수 없이 일어나 뒤로 나간다. 나는 부글거리는 속을 진정시키며 종이 울릴 때까지 수업을 진행한다. 무슨 말을 했는지는 나도 모른다. 나는 수업 후 재석이를 불렀다.
“재석아, 도대체 내가 어떻게 해줘야 하겠니? 수녀님이 너에게 이런 방법, 저런 방법, 할 수 있는 것은 다 찾아서 제안해봤는데 넌 약속만 하지 지키지를 않잖아. 계속 이런 식이면 난 도저히 너랑 수업을 할 수 없어. 그러니 너 스스로 수업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봐라.”
나는 이렇게 심사숙고를 거듭하는데, 재석이는 오늘도 변함없이
“수녀님, 진짜 다음엔 정신 차리고 잘 해 볼게요. 이번만 용서해 주세요.
“미안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이젠 난 너의 말을 믿을 수가 없어.”
“예수님도 잘못한 사람은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 주라고 했잖아요.”
‘어이구, 어이구, 성경 말씀을 이럴 땐 잘도 끌어다 쓴다. 꼭, 지에게 필요한 말만 기억한다니까.’
이런 녀석에게 나 또 쓰러져? 안…돼…. 그래서 던진 말
“아쉽게도 수녀님은 예수님이 아니거든? 그리고 아직 그 경지가 아니거든?”
“그래도 수녀님은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잖아요.”
“노력한다고 모든 것이 다 되는 것은 아니란다. 수녀님도 한계가 있어.”
“저도 하려고 노력하지만 한계가 있어요. 정말이에요.”
진짜와 정말이라는 단어를 번갈아가며 나를 설득하고, 내가 당당히 내세운 ‘한계’라는 히든카드까지 자기 비책으로 내세운 얄밉지만 지혜로운 녀석에게 나는 또 할 말을 잃었다. 속으로만
‘말은 청산유수로 흘러가네. 내가 또 너를 다시 믿어보리?’
라고 웅얼거리며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은 이랬다.
“그래, 그럼 너의 한계를 극복할 구체적인 방법을 찾아서 나에게 알려주면 수녀님도 도와줄게. 너를 다시 한 번 믿고 오늘은 용서한다. 그리고 너! 그렇게 자기 필요할 때만 예수님 말씀 인용하지 마라. 솔직히 얄밉다.”
“저도 예수님 좋아해요.”
휭~, 안타를 날리고 교무실을 빠져 나가는 재석이를 보며 나는 또 다시 예수님께 넋두리를 한다.
“주님, 오늘도 제가 졌지요? 그런데 오늘 진 것은 기분이 좋네요. 제가 사용해야 할 주님 말씀을 그 녀석이 사용했으니까요. 이런 식으로라도 머리에 하나씩 담아가면 언젠가는 행동도 바뀌겠지요? 다음 시간에 또 다시 발등을 찍힐 지라도 일단 오늘은 믿고 넘어갈게요.”
벌
“빨랫줄에 걸린 옷은 다 내 옷이에요.”
“한 번 본 길은 머릿속에 사진처럼 박혀요.”
도벽이 심한 어느 소녀의 말이다. 소녀는 친오빠와 단 둘이 살았다. 오빠는 여동생을 어릴 적부터 데리고 다니면서 도둑질을 가르쳤다. 안 하겠다고 하면 오빠는 소녀의 머리를 개골창에 쥐어박았다. 그러면서 배웠다.
초등학교 3학년 중권이도 소녀처럼 도둑질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소년이었다. 다섯 살 까지 중권이를 키운 양부모는 도벽에 진저리를 치고 내가 있는 나눔의 집에 맡겼다. 그때 중권이 몸 여기저기에는 멍 자국이 가득했다. 양부모는 집 안과 밖에서 도둑질을 하는 중권이의 버릇을 매로 잡으려 했다. 그러나 아이의 버릇은 고쳐지지 않았다. 양부모 집에서 새로운 터전으로 짐 보따리를 옮긴 중권이는 도벽의 터전도 새롭게 바꿔 여전히 진행시켰다. 오늘도 학교에서 돌아온 만수가 나에게 제보를 주었다.
“수사님, 중권이 또 슬쩍 했어요.”
나와 함께 사는 아이들 대부분은 기본이 가출이요. 도벽, 절도, 차털이 등등 크고 작은 비행 경력이 없는 아이가 없었다. 아이들은 일을 저지르고선 야단맞는 걸 또 당연히 여기고 이미 마음 준비를 한다. 이때 매를 맞는다면 아이는 단지 맞은 부분이 아파서 울 뿐이다. 그래서 아이들이 실수를 하거나, 잘못할 때 나는 야단을 치지 않았다. 왜, 그 방법으로는 고쳐지지 않음을 알기에 그렇다. 대신 나에겐 무언의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그 내용은 ‘음악감상’이었다. 지금까지 자신들이 접한 어른들과는 다른 모습을 내가 보여줄 때 아이들은 생각의 변화를 가져올 거라 믿었다. 즉 아이들의 실수와 잘못의 그 순간을 나는 교육의 기회로 삼았다.
도벽이 발견되거나 제보가 들어오면 나는 그 아이를 위해 조용한 방을 준비했다. 책상 위에는 메모지와 팬, 그리고 쟁반에는 평소에 그 아이가 즐겨 먹는 과자와 음료수가 있다. 그리고 아이를 혼자 조용하게 30분 동안 있게 한다.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방 안에서 아이는 과자도 먹고 음료수도 먹었다. 또 백지에 스스로 반성문을 적었다. 누가 쓰라고 하지 않았는데도 아이는 건성이든, 진심이든 스스로 잘못했다고 썼다.
중권이도 나의 이런 도벽 후속절차를 밟았다. 혼자 방안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쥐포와 콜라를 맛나게 먹고 반성하는 마음으로 죄송하다고 썼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이는 또 훔쳤다. 나도 또 그렇게 해 주었다. 계속 중권이는 반복되는 ‘음악감상’을 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나를 아이가 이용한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러면서 아이와 신뢰관계가 형성된다고 믿었다. 아이는 음악감상을 하며 틀림없이 이런 생각을 한다.
‘저 어른, 진심으로 나를 위해 이러는 거야? 아니야, 쇼일 거야. 또 훔쳐도 해 주는가 봐야지.’
그래서 아이는 멈추지 않고 계속 하고 나의 ‘음악감상’도 쉼 없이 진행되었다.
“난, 야단맞을 줄 알았거든요. 벌 받을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여기서는 나에게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지금까지 만난 어른들과는 달라요. 정말 나를 사랑했어요.”
라고 느낄 때까지. 그러니까 나의 도벽 프로그램은 아이에게 사랑이 전달되는 게 목적이며 결국 이 사랑의 힘이 아이의 도벽을 사라지게 한다고 나는 믿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서 아이는 나쁜 습관을 멈추게 된다고.
그 해 구정이 며칠 지난 어느 날이다. 중권이가 학교 친구의 세뱃돈 4만원을 훔쳐서 그 돈으로 과자와 장난감을 사고 남은 돈을 가지고 저녁 늦게 들어왔다. 나는 중권이를 음악감상 방으로 모시기 전에 사무실로 불렀다. 그리고 자초지종을 중권이가 말하는 게 아니라 내가 중권이에게 했다.
“중권아, 그 돈은 남의 돈이니 갚아 주어야 해. 그런데 네가 그 집에 갖다 주면 너를 도둑인 줄 알거야. 난 중권이가 도둑이 되는 거 싫다. 그러니 내가 돌려주고 오마. 가서 이렇게 말하마. ‘친구야, 내가 중권이 아빤데 자식 교육을 잘못시켰구나. 그러니 나를 용서해라.’ 하고 돌아오마. 그동안 중권이는 이 과자 먹고 음악을 들으면서 방에서 내가 돌아 올 때까지 기다려라.”
그리고 정말 나는 그 집을 다녀왔다. 갔다 와서 나는 중권이에게 말했다.
“중권아, 그 친구는 너와 나를 용서해 준다고 했어. 이제 용서를 받았으니 우리는 앞으로 잘 지내면 되는 거야.”
그때까지 표정 없이 듣고 있던 중권이를 나는 가까이 가서 안아 주었다. 나에게 안긴 중권이가 꺼익꺼익 동물처럼 울부짖기 시작했다. 워낙 맷집이 강하여 어지간한 일로는 울지 않는 녀석의 울음은 그치지 않았다. 중권이는 진심으로 마음이 아팠던 것이다.
나는 나눔의 집을 떠났다. 그리고 몇 년 후, 중권이를 다시 만났을 때 농담반 진담반으로 눈빛과 손짓 물음을 던졌다.
‘너 요즘도 쓰윽 하니?’
나의 궁금증에 중권이는 마치 남의 말 하듯 대답했다.
“제가요.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도벽을 안 하고 있어요.”
습관인 도벽이 자기 자신도 모르게 자연적으로 소멸한 것이다.
아이들은 사람의 내면을 보고 판단한다. 그러나 어른들은 아이의 행동을 보고 판단하게 된다.
“너, 왜 훔쳤어.”
“너, 왜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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