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 연구하러온 카자흐스탄 동포 김올가씨
한국어 연구하러온 카자흐스탄 동포 김올가씨
무장투쟁 김경천 장군 외증손녀
‘우리말 경어법’ 석사논문 준비중
“전남대서 민족이주사 박사 계획” “한국어 통·번역사들이 한국어 경어법을 오해해 엉뚱하게 옮기는 일이 잦아요. 그래서 논문 주제를 경어법으로 잡았어요.” 일제강점기 시베리아에서 활약한 ‘항일 영웅’ 김경천(1888~1942)의 외증손녀인 김올가(38·사진)씨는 카자흐스탄국립대 대학원(한국어통번역과)에서 한국어 경어법 관련 석사학위 논문을 준비하던 중 자료 수집을 위해 지난 23일 한국을 찾았다. 현지에 한국어 자료가 없어 애를 태우던 그는 이번 여름방학 때 장학 혜택을 받아 3주동안 광주에서 전남대 교수들에게 지도를 받고 있다. 5일까지 한국에 머물 김씨는 “교수님들과 토론하며 논문의 방향을 잡는 데 큰 도움이 받고 있다”고 말했다. 카자흐스탄 제2의 도시인 까라간다시에서 살았던 김씨에게 한국어는 외국어였다. 한국말을 사용하면 주변의 따가운 질시를 받았던 시절도 있어 신문기자였던 아버지는 한국말을 전혀 쓰지 않았다. 그러나 1991년 한국인 선교사를 만나면서 한국어에 호기심을 갖게 됐다. 96년 한국국제협력단(코이카) 봉사단 단원한테 한달 동안 한글을 배운 그는 97년 알마티 국립대 한국어과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입학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해 알마티대와 자매결연을 맺은 영남대를 방문할 기회도 얻었다. 김씨는 “그때 비행기 안에서 한국땅을 처음 보며 할머니가 저한테 해주신 말씀이 떠올라 많이 울었다”고 말했다. 그의 할머니는 김경천 장군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장군 할아버지처럼 바르게 살아라”고 강조했다고 한다. 김 장군은 일본 육사를 졸업한 뒤 일본군 장교로 복무하다가 3·1운동을 계기로 만주로 망명해 독립투쟁에 나섰다. 20년대 초반 러시아 무장항일투쟁의 제1인자로, 당시 ‘백마 탄 장군’으로 알려진 항일영웅이었다. 그러나 30년대 스탈린 정권의 숙청작업 때 간첩으로 몰려 옥고를 치렀고, 그의 가족들도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당했다. 김 장군은 39년 출옥해 강제이주당한 가족을 찾아 카자흐스탄으로 건너갔다가 또 시베리아로 유배돼 42년 숨졌다. 국내엔 잘 알려지지 않았다가 한·러 수교 이후 98년에야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김씨는 내년 8월께 전남대 대학원 디아스포라학과 박사과정에 진학해 민족이주 문제를 본격적으로 연구할 계획이다. 그는 “외증조부 등 가족사가 민족 이주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돼 있어 나에게 적합한 연구 주제인 것 같다”고 말했다. 광주/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사진 전남대 제공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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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경어법’ 석사논문 준비중
“전남대서 민족이주사 박사 계획” “한국어 통·번역사들이 한국어 경어법을 오해해 엉뚱하게 옮기는 일이 잦아요. 그래서 논문 주제를 경어법으로 잡았어요.” 일제강점기 시베리아에서 활약한 ‘항일 영웅’ 김경천(1888~1942)의 외증손녀인 김올가(38·사진)씨는 카자흐스탄국립대 대학원(한국어통번역과)에서 한국어 경어법 관련 석사학위 논문을 준비하던 중 자료 수집을 위해 지난 23일 한국을 찾았다. 현지에 한국어 자료가 없어 애를 태우던 그는 이번 여름방학 때 장학 혜택을 받아 3주동안 광주에서 전남대 교수들에게 지도를 받고 있다. 5일까지 한국에 머물 김씨는 “교수님들과 토론하며 논문의 방향을 잡는 데 큰 도움이 받고 있다”고 말했다. 카자흐스탄 제2의 도시인 까라간다시에서 살았던 김씨에게 한국어는 외국어였다. 한국말을 사용하면 주변의 따가운 질시를 받았던 시절도 있어 신문기자였던 아버지는 한국말을 전혀 쓰지 않았다. 그러나 1991년 한국인 선교사를 만나면서 한국어에 호기심을 갖게 됐다. 96년 한국국제협력단(코이카) 봉사단 단원한테 한달 동안 한글을 배운 그는 97년 알마티 국립대 한국어과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입학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해 알마티대와 자매결연을 맺은 영남대를 방문할 기회도 얻었다. 김씨는 “그때 비행기 안에서 한국땅을 처음 보며 할머니가 저한테 해주신 말씀이 떠올라 많이 울었다”고 말했다. 그의 할머니는 김경천 장군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장군 할아버지처럼 바르게 살아라”고 강조했다고 한다. 김 장군은 일본 육사를 졸업한 뒤 일본군 장교로 복무하다가 3·1운동을 계기로 만주로 망명해 독립투쟁에 나섰다. 20년대 초반 러시아 무장항일투쟁의 제1인자로, 당시 ‘백마 탄 장군’으로 알려진 항일영웅이었다. 그러나 30년대 스탈린 정권의 숙청작업 때 간첩으로 몰려 옥고를 치렀고, 그의 가족들도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당했다. 김 장군은 39년 출옥해 강제이주당한 가족을 찾아 카자흐스탄으로 건너갔다가 또 시베리아로 유배돼 42년 숨졌다. 국내엔 잘 알려지지 않았다가 한·러 수교 이후 98년에야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김씨는 내년 8월께 전남대 대학원 디아스포라학과 박사과정에 진학해 민족이주 문제를 본격적으로 연구할 계획이다. 그는 “외증조부 등 가족사가 민족 이주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돼 있어 나에게 적합한 연구 주제인 것 같다”고 말했다. 광주/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사진 전남대 제공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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