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사찰 피해자 엄윤섭씨
‘감시’ 공포로 우울증 심해져
3년 고통끝…아파트서 투신
‘감시’ 공포로 우울증 심해져
3년 고통끝…아파트서 투신
지난 2009년 국군기무사령부의 민간인 불법사찰로 피해를 당한 엄윤섭(45·사진)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국가권력이 자신을 몰래 감시하고 있다는 불안감이 엄씨를 극단적 선택으로 내몬 것으로 보인다.
서울 동작경찰서는 지난 7일 새벽 동작구 노량진동 한 아파트 화단에 엄씨가 숨져 있는 것을 주민이 발견해 신고했다고 12일 밝혔다. 경찰 조사 결과, 지난 5일 서울 신림동 집을 나간 엄씨는 이틀 만에 이 아파트 18층에서 스스로 뛰어내린 것으로 드러났다. 짤막한 유서엔 “죽음으로 속죄한다”고 적혀 있었다.
서울대 기계항공공학부 박사과정을 수료한 엄씨는 학부생 시절인 1986년 서울대생 김세진·이재호씨 분신사건을 목격한 뒤부터 우울 증세가 시작됐고, 특히 3년 전 기무사의 불법사찰을 당한 뒤 불안 증세가 더욱 악화됐다고 가족들은 증언했다.
아내 안아무개(44)씨는 “사찰 파문 이후 남편은 마치 등에 무언가를 매달고 다니는 것처럼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고, 안정을 찾지 못한 채 늘 불안하고 초조해했다”고 말했다. 평소 우울증을 고려하더라도 기무사 불법사찰이 엄씨를 죽음에 이르게 한 직접적 원인이라는 것이다.
기무사의 민간인 불법사찰은 2009년 8월 경기도 평택에서 열린 쌍용자동차 파업 관련 집회를 녹화하던 기무사 수사관이 집회 참가자들에게 붙잡혀 들통났다.
당시 집회 참가자들은 기무사 수사관으로부터 민주노동당 당원과 시민단체 회원들의 일상생활이 기록된 영상 테이프와 수첩 등을 빼앗았는데, 2008년 총선 당시 민주노동당 서울 관악을 후보로 출마했던 엄씨는 물론 아내 안씨의 일상생활을 찍은 테이프도 발견됐다.
가족과 지인들은 “불법사찰 사건 이후 엄씨가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가 갈까봐 노심초사했다”고 전했다. 엄씨와 함께 불법사찰을 당한 최아무개씨는 “‘나 때문에 지인들이 피해를 입을 수 있다’며 엄씨가 연락을 하지도 받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아내 안씨도 “평소 남편은 집전화를 잘 쓰지 않았는데, 어느 날 남편 휴대전화를 보니 친구와 지인 번호까지 모두 삭제돼 있었다”고 전했다.
누군가로부터 미행을 당한다는 불안감에 시달리던 엄씨는 지난 2월 서울 신길역 근처 둑 위를 달리다 발을 헛디뎌 추락해 골절상을 입기도 했다. 5개월 동안 치료를 받아야 하는 중상이었다. 당시 경찰은 엄씨의 소지품에서 휴대전화나 연락처를 찾을 수 없어 어렵게 주민등록번호를 확인해 가족들에게 사고 소식을 알려야 했다.
강원대 의대 황준원 교수는 “엄씨의 경우 1986년 분신사건이 심리적 외상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고, 만성적인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또는 우울증’ 상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며 “기무사의 불법사찰이 우울증을 악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 것 같다”고 분석했다.
엄씨는 집을 나가기 전날인 4일 저녁 아내와 두 딸에게 자신만의 ‘마지막 인사’를 했다. 아내 안씨는 “그날 남편이 ‘미안하다’는 말을 했는데, 평소에 하지 않던 말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게 마지막으로 남기려 했던 말인 것 같다”며 울먹였다.
박현철 기자 fkcoo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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