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피해자 엄윤섭씨는
1985년 서울대 공대에 입학한 엄윤섭(45)씨는 당시 학교 안팎에서 벌어진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면서 사회·정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
대학 입학 이듬해인 1986년 엄씨는 선배 김세진·이재호씨의 분신을 목격했다. 엄씨의 지인인 서주호 통합진보당 서울시당 사무처장은 “두 학번 위 선배인 김세진씨와 평소 알고 지내는 사이였던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세례를 받은 엄씨는 대학 졸업 뒤에도 여러 시민단체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활발하게 사회문제에 참여했다.
민주노동당 당원이기도 했던 엄씨는 2008년 18대 총선에서 서울 관악을에 출마했다. 총선을 앞둔 그해 2월 심상정·노회찬 의원 등이 민주노동당을 탈당해 진보신당을 창당하자 민주노동당은 타격을 입었고, 이 당의 관악구위원회도 500명 넘는 당원들이 총선을 앞두고 당을 떠나 마땅한 후보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선뜻 나서는 이가 없던 상황에서 당시 민주노동당 관악구위원회 자주평화통일위원장이던 엄씨는 자발적으로 총선 후보로 출마했다. 2264표(득표율 3.6%)를 얻어 비록 낙선했지만, 이때부터 국군 기무사령부가 엄씨를 불법사찰 대상에 포함시킨 것으로 보인다. 서주호 사무처장은 “과거 국가보안법이나 공안사건에 연루된 적이 전혀 없었던 엄씨가 그해 총선에 나가지 않았다면 기무사의 사찰 대상이 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이후 엄씨 등 불법사찰 피해자 14명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고, 법원은 “민간인을 미행하고 촬영하는 등 기무사의 직무범위를 일탈한 위법행위”라며 1·2심 모두 정부의 배상 책임을 인정했지만, 정부는 판결에 불복해 지난 5월 상고했다. 이 사건은 현재 대법원에 계류중이다.
정부가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엄씨의 고통은 더 커졌다. 기무사의 불법사찰은 대학시절 선배의 분신을 목격하며 생긴 마음의 불안을 다시 자극하는 계기가 됐다. 엄씨의 아내 안아무개(44)씨는 12일 “사찰 이후 남편의 눈빛은 더욱 불안해졌고 외출한 뒤 옷이 찢어진 채로 돌아오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후 엄씨 일상에도 중대한 변화가 생겼다. 낙선 이후 좀처럼 당 행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그는 2009년 11월 자신의 블로그에 그 이유를 밝혔다. “논문 핑계를 대고 의식적으로 민노당과 멀어졌다. 논문 작업과 생업 재개를 회복하는 과정에서 사색과 번민으로 무수한 밤을 밝혔다.” 불법사찰의 피해를 겪으면서 정당 활동까지 멀리하게 됐고, 이후 점점 더 자신만의 세계에 침잠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는 도중에도 전공 공부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했다. 기계항공공학부 박사과정도 수료했다. 엄씨는 지난해 6월 대학시절을 회고하며 블로그에 쓴 글에 “그때 난 시내로 데모 하러 나가면서도 강의실에 앉아 있는 친구들이 너무 부러웠다”며 “꿈에도 그리는 전공 공부를 언젠가는 마음껏 열심히 해 보리라 다짐했었다”고 적었다. 박현철 기자 fkcoo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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